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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석의 용과 천리마] 북한의 핵 야욕과 중국

중앙일보

입력

2022년 3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가죽 재킷을 입고 선글라스를 낀 채 신형 ICBM '화성-17형' 발사 선전 영상에 등장한 모습. 조선중앙통신

2022년 3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가죽 재킷을 입고 선글라스를 낀 채 신형 ICBM '화성-17형' 발사 선전 영상에 등장한 모습. 조선중앙통신

북한이 지난 9일부터 2~3일 간격으로 미사일을 쏘고 있다. 한미연합군사훈련에 대한 반발이다. 그런데 과거와 차이가 있다. 북한은 과거 한미연합군사훈련 동안엔 도발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훈련 기간에 맞대응하고 있다. 급기야 지난 19일에는 해상 800m 상공에서 핵미사일 폭발 시험까지 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실제로 적에게 공격을 가할 수 있는 수단으로 언제든 적이 두려워하게 신속 정확히 가동할 수 있는 핵 공격 태세를 완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북한의 핵 능력이 점점 고도화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핵무기를 만들려는 의지가 있으면 반드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북한은 왜 핵 야욕을 멈추지 않을까? 그 원인은 뻔하다. 미국의 핵 위협을 구실로 자국의 안보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북한의 핵 야욕 역사는 길고도 길다. 핵 개발 이론 연구부터 따지면 1946년부터 시작했다. 33세의 김일성은 1945년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영원할 줄 알았던 일본이 하루아침에 항복하는 것에 깜짝 놀랐다. 그는 그 ‘신비의 무기’에 강한 집념을 가졌다.

그 이후 몰래 숨어서 더디게 핵 개발을 하다가 가속페달을 밟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있었다. 바로 1992년 8월 한·중 수교다. 1990년 한·소 수교에 이어 한·중 수교는 북한이 더는 자국의 안보를 다른 나라에 맡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피로 맺은’ 북·중 관계를 뿌리째 뒤흔드는 사건이었으며 북한으로서는 중국의 배신이었다. 따라서 북한의 핵 개발은 유일한 안보적 대안이 돼 버렸다.

김정일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토로했다. 그는 “러시아와의 관계도 기대할 수 없고 앞으로는 중국도 기대할 수 없게 됐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덧붙여 “우리는 정신적 원자탄이라고 할 수 있는 주체사상과 제조과정에 있는 물질적 원자탄과 노동 3호 미사일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한·중 수교에 겉으로 태연했다. 먼저 김일성은 한·중 수교하기 한 달 전인 1992년 7월 방북한 첸치천 중국 외교부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김일성은 “중국이 독립적이고 자주적이며 또 평등한 입장에서 자신의 외교정책을 결정하는 것을 이해한다. 우리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계속해서 자주적으로 사회주의를 견지하고 또 사회주의를 건설해 나갈 것”이라고 전달했다.

김정일도 아버지의 표현을 이어받았다. 2000년 5월 중국 방문을 앞두고 그해 3월 주북한 중국대사관을 찾았다. 그는 완융상 중국대사에게 “중·한 수교는 중국이 결정할 일이었다. 북한은 0.001%도 의견이 없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북·중 친선만 변하지 않으면 충분하다”고 밝혔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모두 중국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취지로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한·중 수교를 김일성에게 제일 먼저 알린 사람은 양상쿤 중국 국가주석이었다. 1992년 4월 김일성 생일 80주년을 축하하러 방북하면서다. 양상쿤은 중국 지도부 가운데 가장 친북적인 인사였다. 그런데도 양상쿤이 평양에 도착할 때는 크게 환영받았지만, 귀국할 때는 공항에 배웅하는 북한 인사가 한 명도 없었다. 김일성은 양상쿤을 내쫓듯이 돌려보냈다.

북한은 한·중 수교가 체결된 이후 그해 9월부터 중국에 ‘융단 폭격’을 퍼부었다. 조선중앙통신은 1992년 9월 “중국은 제국주의에 굴복한 변절자·배신자”라고 비판했다. 한·중 수교에 대한 강한 불만이 깔린 것이다. 그리고 분노는 행동으로 옮겨졌다. 1993년 1~4월 조선인민군은 압록강 변에서 무려 42차례나 도발 사건을 일으켰다. 700여 발의 총탄을 퍼부었으며 중국인민해방군 변방 근무자 18명, 민간인 13명이 다쳤다. 또한 북한은 1993년 4월 베이징-평양행 중국 민항기의 평양 비행을 금지했다.

여기서 잠깐 제1차 북핵 위기를 얘기하자. 설상가상으로 북한은 1993년 3월 12일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북한 영변 핵시설의 사찰 문제로 갈등이 생기면서다. 한·중 수교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예민해진 북한이 IAEA의 특별 사찰을 거부하면서 갈등이 일파만파로 커졌다. 북한의 탈퇴 선언은 NPT가 1970년 발효된 이후 처음이라 국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탈퇴 선언을 하더라도 그 선언한 날로부터 90일이 지나야 효력이 발생한다. 다행히 북한은 90일이 끝나기 하루 전날인 1993년 6월 11일 미국과 합의하고 NPT 탈퇴를 유보했다. 그리고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로 제1차 북핵 위기는 마무리됐다.

중국은 제1차 북핵 위기 때 남의 일로 생각했다. 북한과 미국의 일로 간주한 것이다. 그리고 북한의 핵 능력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왜냐하면 중국이 핵무기를 제조할 때 해외에서 우수한 중국인에게 크게 의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한이 우수한 해외 인력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핵무기를 만든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다시 한·중 수교 이후로 돌아오면, 김정일은 1994년 11월 ‘사회주의 과학이다’라는 논문에서 중국을 더 몰아세웠다. 그는 “사회주의 배신자들은 사회주의 이념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추악한 배신행위를 변호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북한은 불만을 있는 대로 쏟아냈다. 덩샤오핑이 1997년 2월 사망했을 때 보낸 김정일의 조전은 찬바람이 느껴질 정도였다. “덩샤오핑 동지가 조·중 우의를 위해 행한 공적은 우리 인민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애도하는 감정 없이 형식적 내용만 담았다.

북한의 배신감은 오래갔다. 한·중 수교 이후 북·중 지도자 상호 방문은 7년 동안 중단됐다. 북·중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한 것은 1999년부터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홍성남 내각 총리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을 대동하고 중국을 방문했다. 김영남의 중국 방문은 1992년 4월 양상쿤 중국 국가주석의 방북을 끝으로 끊어졌던 양국 정상급 지도자들의 상호 방문 관례를 복원시키는 계기가 됐다.

북한은 7년 동안 김일성 사망·홍수·가뭄 등으로 ‘붕괴론’까지 언급될 정도로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결국 심각한 경제 위기와 외교적 고립에 빠진 북한으로서는 중국과의 장기적인 관계 소원이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정상외교를 가동한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북한은 1979년 미·중 수교에 이어 1992년 한·중 수교로 중국으로부터 포기의 두려움을 더 갖게 됐다. 김정일 말대로 결국 믿을 것은 원자탄과 미사일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고수석 국민대 겸임교수

더차이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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