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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테이너에 내 집 입주 막힌 초유 사태…신목동파라곤 악몽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32년째 군 장교로 복무 중인 A씨(54)는 결혼 후 25년간 이사를 17번 다녔다. 이사 때마다 군인아파트라 불리는 군 관사를 전전해야 했고, 두 자녀가 성인이 된 뒤부터는 뿔뿔이 흩어져 살았다. A씨는 온 가족이 다시 함께 살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싶었지만, 빠듯한 군인 월급으로는 수도권에 집을 살 여건이 되지 않았다.

전역 후 아내와 노후를 보낼 집이 절실했던 A씨는 2017년부터 군인 특별분양을 신청해 왔지만 번번이 탈락했다. 저축과 대출을 모두 끌어모아 구축 아파트를 알아봐야겠다고 마음을 먹던 차에 서울 신월동 소재 재건축아파트 신목동파라곤에 군인 특별분양 세대가 2개 배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중 청약점수가 비교적 낮은 24평형 세대를 신청한 A씨는 1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당첨됐다. A씨는 “군 장교들은 1~2년마다 이사를 하기 때문에 외벌이인 경우 집 장만이 쉽지 않다”며 “비록 넓은 집은 아니지만 생애 첫 아파트라 정말 기뻤고, 주위에서도 축하를 받았다”고 말했다. 경상도에서 근무·거주 중인 A씨는 올 연말 근무지도 수도권으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 월세살이를 하던 자녀들도 결혼하기 전까지는 한 데 모여 살기로 해, 8년 만에 네 식구가 함께 산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지난 14일 서울 신월동 신목동파라곤 아파트 주차장 앞을 공사비 분담 문제로 유치권을 행사한 시공사가 컨테이너로 막고 있다. 이 아파트 입주지연 사태는 24일 현재 25일째 이어지고 있다. 뉴스1

지난 14일 서울 신월동 신목동파라곤 아파트 주차장 앞을 공사비 분담 문제로 유치권을 행사한 시공사가 컨테이너로 막고 있다. 이 아파트 입주지연 사태는 24일 현재 25일째 이어지고 있다. 뉴스1

악몽된 내집 마련의 꿈…유치권 행사에 중도금 대출 막혀

그런데 입주예정일을 열흘 앞둔 지난달 28일 A씨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했다. 시공사(동양건설산업)와 신월4구역 주택재건축정비사업조합 사이 추가 공사비 분담 분쟁이 벌어진 탓이다. 시공사가 유치권을 행사하면서 용역·차량·컨테이너박스 등으로 아파트 입구를 봉쇄, 조합원은 물론 A씨와 같은 일반분양자들의 입주까지 막는다는 내용이었다. A씨는 조합과 무관한 일반분양자의 입주는 허용해달라고 항의했으나 시공사 측은 “일반분양세대 입주 때 조합원들이 무단으로 입주를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입주 지연 사태가 길어지자 기존 월셋집을 빼고 이사를 준비하던 딸은 최근 임시로 다른 월세방을 구했다. 1월 퇴사해 입주 후 재취업하려던 A씨의 아내도 경상도와 서울을 수시로 오가면서 새 직장을 알아보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은행 대출이다. 그간 모아 뒀던 돈으로 계약금과 두 차례 중도금을 충당해 온 A씨는 나머지 중도금 3억7000만원은 아파트 담보대출로 납부하려고 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입주 불가 사태로 은행이 대출을 중지하면서 중도금 완납 일정이 묘연해졌다. 중도금을 완납해야 소유권이전등기가 가능한 데다 중도금 완납이 늦어질수록 9~10%의 연체 이자를 물어야 해 A씨는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A씨는 “온 가족이 감내해야 하는 정신적·물질적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라며 “내 의지와 무관하게 신용불량자가 될 판이라 하루하루 돈 걱정과 사회에 대한 원망만 늘어나고 있다”고 토로했다.

서울 신월동 신목동파라곤 일반분양세대 입주 예정자인 이모(52)씨의 이삿짐이 임시 거처 1층에 방치돼 있다.

서울 신월동 신목동파라곤 일반분양세대 입주 예정자인 이모(52)씨의 이삿짐이 임시 거처 1층에 방치돼 있다.

자녀 입학취소, 단기임대 전전…일반분양자 피해 속출 

신목동파라곤 총 299세대 중 A씨와 같이 입주가 막힌 일반분양세대는 153세대다. 이 중 지난달 28일 아파트 임시사용승인 직후 입주를 준비하던 이들은 길게는 25일간 모텔이나 단기 임대 빌라 등 임시 거처에서 생활하고 있다. 새로 장만한 가전 등 이삿짐은 임시 보관 장소에 방치돼 있다. 새학기에 맞춰 입주할 계획이던 맞벌이 부부의 경우 자녀의 인근 학교 입학이 취소됐다. 새로 등록한 학원까지 자녀를 등하원 시키려면 서울 송파·은평·종로구 등에서 1~2시간이 소요돼 아예 휴가를 낸 세대도 있다. A씨와 같이 은행 대출 길이 막힌 이들도 적잖아 일부는 현 상황을 비관하는 글을 남긴 채 일반분양자 단체대화방을 떠났다.

설상가상으로 조합이 지난달 24일 시공사를 상대로 낸 업무방해금지 가처분 신청은 지난 17일 법원에서 기각됐다. 서울남부지법 민사합의51부(부장 김우현) 결정문에 따르면, 앞서 조합과 시공사는 계약서에 ‘2018년 7월 이후부터는 기획재정부 발표 소비자물가지수를 기준으로 3% 이상 물가가 상승할 경우 양측 협의로 공사비 단가를 조정한다’고 명시했다. 이후 물가가 큰 폭으로 상승하자 시공사는 2021년 12월부터 조합에 공사비 증액을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조합은 관련 회의를 단 한 차례만 개최하는 등 협의 요구에 제대로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재판부는 시공사의 유치권 행사가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일반분양자 측은 이 가처분 소송에 보조참가인으로 참여해 “일반분양세대의 경우 시공사가 유치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추가 공사대금채권이 일반분양세대와 그 견련관계(유치권과 목적물의 관련성)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일반분양자들의 정신적·경제적 피해는 조합이 시공사의 정당한 협의 요구에 상당 기간 응하지 않아 발생했다고 볼 여지가 크다”고 덧붙였다. 시공사보다 조합측 책임이 크다는 취지다. 일반분양자 측은 시공사의 유치권 행사가 권리남용이라고도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유치권 행사가 정의 관념에 비춰 용인될 수 없는 정도의 상태에 이르렀거나, 시공사에 아무런 이익이 없는데도 오로지 조합 등에 고통을 주고 손해를 입히려는 목적으로 권리를 행사한 게 아니다”라고 판시했다.

일반분양자 측은 지난 17일 조합으로부터 확약서를 받아 양천구청을 통해 동양건설산업 측에 보냈지만 24일 현재 아직 답변을 받지 못했다.

일반분양자 측은 지난 17일 조합으로부터 확약서를 받아 양천구청을 통해 동양건설산업 측에 보냈지만 24일 현재 아직 답변을 받지 못했다.

공사비 협상 난항에 조합은 항고, 시공사는 묵묵부답 

법원 결정으로 사태가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자 일반분양자 측은 ‘시공사 조합원 분양분을 제외한 나머지 153세대 일반분양분에 대한 일반분양자들의 입주를 허용할 경우 위법한 방법으로 점유침탈 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내용의 확약서를 조합으로부터 받아냈고, 이를 중재자인 양천구청을 통해 지난 17일 시공사 측에 보냈지만 아직 회신을 받지 못했다. 시공사 측은 조합이 지난 21일 항고하는 등 법원 결정에 불복하고 있어 확약서에 대한 추가 법률검토가 필요하단 입장이라고 한다. 일반분양자 측 대리인인 이재우 변호사(법무법인 김장리)는 “조합과 시공사의 공사비 분쟁으로 조합원의 입주가 막힌 사례는 종종 있었지만, 일반분양자에 대한 키 불출까지 거부하는 사태는 극히 드물다”며 “주거안정을 위한 청약제도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초유의 사건에 다들 절망을 예감하고 매우 불안해 하는 상태”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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