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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혜수의 카운터어택

혁명적 발전, 점진적 퇴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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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장혜수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장혜수 콘텐트제작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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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1922~96)의 『과학혁명의 구조』 번역서(1980년 이후 여러 차례 국내 번역)를 열어 보긴 했다. 몇 쪽 넘겼지만, 읽을 엄두는 내지 못했다. 소문대로 어려웠다. 그러다 마주쳤다.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읽기』라는 책. 그 덕분에 쿤 주장의 얼개를 (이해가 아니라) 암기할 수 있었다. 요약하면 이렇다.

‘과학 패러다임은 지식을 누적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며, 새로운 실험이나 관찰을 통해 이론이 발전한다→실험이나 관찰에서 지식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이론을 수정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이론 수정이 불가능한 상황이 생기고, 결국 패러다임 자체를 의심하게 된다 →상황 해결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제시되며, 이를 통해 전보다 포괄적으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새 패러다임으로 이전 패러다임은 비정상적인 지식으로 남는다.’

잠깐. 이 코너는 스포츠 칼럼 아닌가. 과학으로 칼럼 문을 연 건 패러다임을 바꾸려는 시도였다고 한다면, 쿤을 모독하는 일일 터다. 최근 별세한 운동선수 얘기의 마중물을 찾다가 생각이 쿤까지 흘렀을 뿐이다. 스포츠사에서 가장 혁명적으로 패러다임을 바꿨다고 할 선수. 미국 육상 높이뛰기 선수 리처드 더글러스 포스베리다. 그가 지난 12일, 7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68년 올림픽에서 배면뛰기로 바를 넘는 포스베리. 스포츠사에서 혁명적인 패러다임 전환 순간 중 하나다. [AFP=연합뉴스]

1968년 올림픽에서 배면뛰기로 바를 넘는 포스베리. 스포츠사에서 혁명적인 패러다임 전환 순간 중 하나다. [AFP=연합뉴스]

자신의 이름을 딴 ‘포스베리 플롭’, 우리 말로 ‘배면(背面)뛰기’ 기술을 만든 그 선수다. 설명하면 입만 아플 만큼, 너무도 유명한 기술이다. 모두가 바(bar)를 보면서 뛰어넘던 시절, 그는 바를 향해 등을 돌렸다. 그의 눈은 바 대신 창공을 향했다. 그는 이 기술로 1968년 멕시코시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그날 이후 세상의 거의 모든 높이뛰기 메달리스트가 이 기술을 썼다.

높이뛰기는 운동에너지를 위치에너지로 바꾸는 종목이다. 중요한 건 몸의 무게중심(대개 배꼽 근처)을 어떻게 할 것인가다. 포스베리 플롭 등장 전 기술들은 무게중심이 바 한참 위로 지났다. 높이는 게 관건이었다. 그렇지 않겠나. 뛰어올라 바를 넘는 일인데. 새 기술은 몸의 무게중심 통과 높이를 바 근처까지 낮췄다. 낮추는 게 관건이다. 뒤로 돌아 뛰어오른 뒤 엉덩이만 살짝 높여 몸을 U자로 만들고, 마지막에 발만 좀 들어주면 끝. 와우.

쿤은 패러다임 전환이 혁명적으로 이뤄진다고 했다. 점진적으로 바뀐다면 전환일 수 없다. 그래서 발전은 혁명적이다. 그럼 퇴보는? 점진적으로 서서히 온다. 퇴보하면서도 깨닫지도 못한다. 우물 저 깊은 곳으로 조금씩 내려간다. 위를 올려다본 뒤에야 자신이 저 아래에 있음을 깨닫는다. 1라운드 탈락, 1라운드 또 탈락, 1라운드 한 번 더 탈락, 그렇게. 그 사이 누군가는 만화 같은 우승 드라마를 연출했다. 혁명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