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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림 “내가 버티면 KT 더 망가져” 지명 보름 만에 사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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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KT의 차기 대표이사(CEO) 후보로 선정됐던 윤경림 KT 그룹트랜스포메이션부문장(사장)이 사의를 표명했다. 지난 7일 CEO 후보로 지명된 지 약 보름 만이다. KT를 향한 정부·여권의 비판 기류가 잦아들지 않는 데다, 시민단체의 고발 이후 검찰 수사가 본격화하며 심리적 압박을 느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구현모 현 대표의 임기가 일주일여밖에 남지 않은 가운데, 새로운 수장을 찾기까지 KT의 경영 공백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23일 통신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윤 후보는 전날 이사진과 만나 “내가 계속 해서 버티면 KT가 더 망가질 것 같다”며 CEO 후보에서 물러날 뜻을 밝혔다. 그는 “이사진이 윤 후보자를 오랫동안 설득했지만, 결국 윤 후보의 사의를 수용한 것으로 안다”며 “조만간 이사회를 거쳐 후보 사퇴 사실을 공시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오는 31일로 예정된 정기 주주총회에서는 차기 CEO 선임 안건이 논의되지 않을 예정이다.

윤 후보가 CEO 레이스에서 중도 이탈한 데는 정부·여당의 압박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지난 2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의원 7명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KT 이사회가 그들만의 이익 카르텔을 만들어가고 있다”며 “구현모 대표가 후보에서 사퇴하며 자신의 아바타로 윤경림 사장을 세웠다는 소문이 있다”고 주장했다.

“조만간 이사회 거쳐 후보사퇴 공시”

지난 7일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국무회의 마무리 발언에서 “국민을 위해 이권 카르텔 세력에 단호하게 대응하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날은 KT가 윤경림 사장을 차기 CEO 최종 후보로 발표한 날이다. 윤 대통령의 발언은 KT뿐 아니라 임기를 1년 남겨둔 포스코 회장직, 그리고 다른 공기업의 CEO 인선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겠다는 의지로 해석됐다.

검찰 수사도 KT를 겨누고 있다. 시민단체 ‘정의로운사람들’이 지난 7일 구 대표와 윤 후보를 업무상 배임 등의 혐의로 고발했다. 2021년 7월 현대차가 에어플러그(구 대표의 형이 창업한 벤처기업)를 인수하는 과정에 구 대표와 윤 후보가 관여했고, 윤 후보가 이에 대한 대가로 KT 임원에 영입됐다는 주장이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이날 조승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성명을 통해 “대통령실이 최후통첩을 날렸고, 검찰과 경찰이 KT 수사에 본격적으로 들어가며 압박한 결과”라며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은 KT 등 민간의 자율적 결정을 존중하고, 비정상적인 개입을 중단하기 바란다”고 밝혔다.

KT 안팎은 윤 후보의 갑작스러운 사퇴에 술렁이고 있다. KT 경영진에 우호적이었던 국내 소액주주는 혼란스러운 분위기다. 그간 최대 주주인 국민연금(의결권 기준 10.13%)과 2대 주주인 현대차그룹(7.79%)은 윤 후보 선임안에 부정적인 입장이었지만 일부 국내 소액주주는 온라인 주주 모임을 통해 윤 후보를 지지해 왔다.

지난달 25일 온라인에 개설된 KT 주주모임의 회원 수는 현재 1700여 명(보유 지분 약 1.3%). 이들은 주총 전까지 주식 500만 주(지분율 약 1.9%)를 모아 윤 후보에 찬성표를 던질 계획이었다. 이들은 “외압에 무너진 것” “주주들의 노력이 물거품이 됐다”며 실망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소수 노조인 KT새노조는 윤 후보의 사퇴를 무책임하고 비겁하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성명을 통해 “이사회가 자신들의 인력풀 안에서 무리하게 후보를 뽑은 데서 비롯된 실패”라며 “대혼란을 초래한 이사회에 대해 단호한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외국인 주주의 신뢰가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KT의 외국인 주주 지분은 지난해 주총 기준으로 43.14%다. 앞서 지난 19일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사인 ISS는 윤 후보의 대표 선임 안건에 찬성 의견을 내면서 “사내이사로서 법적 우려가 있는 이사(구현모 대표)에 대해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아 지배구조 감독과 위험 관리에 대한 책임 문제가 있다. 그럼에도 CEO 후보가 없다면 주주 가치뿐 아니라 회사의 가치가 훼손될 수 있어 선임안에 찬성한다”고 설명했다.

통신비 인하 정책 겹쳐 주가 악재

증권업계 관계자는 “당분간 경영 공백이 불가피한 데다 정부의 통신비 인하 정책이 겹쳐 KT의 주가에 악재로 작용할 것”이라며 “최근 외국인 순매도 폭이 큰 편이었는데 이 경향이 강화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날 코스피 시장에서 KT는 전날보다 1.31% 떨어진 3만50원에 거래를 마쳤다.

윤 후보의 사퇴로, 31일 열릴 KT 주총에서는 CEO 선임안과 윤 후보가 제안한 신규 사내이사 선임 안건은 제외되고 사외이사 3명 재선임 안건만 처리될 전망이다. CEO 선임의 경우 공모 절차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공모 후 최종 후보를 선발한 뒤 임시 주총에서 의결을 거쳐야 하는 것. 구현모 현 대표의 임기는 주총일인 31일에 끝난다.

한편 이날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중앙일보와 만나 “앞으로 KT가 국내 대표 통신업체로서 투명한 지배구조 체제를 만들어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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