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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하현옥의 시선

퇴직금도 국민 정서에 부합하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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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하현옥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하현옥 경제산업 부디렉터 겸 증권부장

하현옥 경제산업 부디렉터 겸 증권부장

눈을 의심했다. 지난 16일 금융위원회가 배포한 ‘은행권 경영·영업 관행·제도 개선 TF’ 실무작업반 논의 결과 보도참고자료를 보면서다. 연일 ‘은행 때리기’에 나선 당국이 하나부터 열까지 못마땅한 것을 바꾸고 싶은 듯하지만 이건 좀 나갔다 싶어서다.

놀란 부분은 이 부분이다. ‘성과급·퇴직금의 지급 수준에 있어서도 직원·노조와의 공감대뿐 아니라 국민과의 공감대 형성이 중요하고, 희망퇴직금 지급 수준의 경우 단기적인 수익 규모에 연계하기보다는 중장기적 조직·인력 효율화 관점에서 판단해야 하며 주주와 국민 정서에도 부합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국민정서법’을 끌어들인 것이다.

이른바 ‘국민정서법’은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사회적 분위기다. 말하자면 ‘여론법’인 셈인데, 특정 사건에 대해 국민이 집단적으로 느끼는 감정이나 정서 등이 통상 법보다 우위에 있는 경우가 많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지만, 논리적인 설명과 무관하게 무엇보다도 힘이 세다. ‘국민 정서’까지 나올 정도면 뭐 상황은 끝났다고 봐도 된다.

이 천하무적의 '국민 정서'와 '국민과의 공감대 형성'이 은행권의 퇴직금 수준을 결정하는 잣대로 등장한 것이다. 일반 국민이 받아들일 수 없다면 쉽지 않을 수 있단 말이다. 금융의 공적인 성격을 감안해도 공기업도 아닌 특정 기업 혹은 회사의 퇴직금이 공론의 영역에 오른다는 건 뭔가 조금 잘못 돌아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국민의 공감이 특정 회사의 성과급이나 퇴직금을 결정하는 요인이 되다니.

그럼에도 당국이 내세운 근거는 이렇다. '최근 은행권의 대규모 수익은 임직원의 노력보다는 코로나 및 저금리 지속 등으로 대출 규모가 급증한 상황에서 최근 금리상승이라는 외부적 요인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은행원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겠지만) 기준금리 인상에 편승해 땅 짚고 헤엄치는 이자놀이로 돈을 벌어 잔치를 벌이는 건 못마땅하다는 속내가 읽힌다. 그러니 언감생심, 성과급이나 희망퇴직금을 높이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공공재 논란 속 은행업 개선 TF
“성과급, 국민 공감대 형성 중요”
또다른 차원의 포퓰리즘 아닌가

그뿐만 아니다. ‘은행=공공재’ 논란 속에서 이미 속이 터질 대로 터진 은행 주주들이 뒷목 잡을만한 주장도 이어진다. ‘주주환원과 배당은 주주(shareholder)의 문제가 아닌 이해관계자(stakeholder·국민이나 금융시장 참여자 등)까지 고려해 보다 폭넓은 관점을 가지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것. 이른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다.

주주뿐만 아니라 직원과 투자자, 사회·정부 등 기업과 관련한 이해관계자를 고려하는 것, 충분히 갈 수 있는 방향이다. 하지만 그 방향은 개별 금융사가 회사의 상황 등을 고려해 이사회 등을 통해 결정할 일이다. 위험을 감수한 투자나 은행의 경영에 대한 성과, 더 나아가 인력 조정 등과 관련한 문제에 있어서 국민 정서나 공감대가 고려 요인이 된다면 또 다른 차원의 포퓰리즘에 따른 왜곡 현상이 빚어질 수 있다.

은행과 금융권을 좌지우지하려는 금융 당국과 정부의 ‘보이는 손’은 이미 도를 넘어서는 듯하다. 낙하산 인사와 예금 및 대출 금리에 당국의 입김이 가세한 ‘관치 금리’를 넘어 ‘관치 채용’ 논란까지 빚어질 지경이다. 지난달 20일 금융위 부위원장이 주재한 ‘금융권 청년 일자리 간담회’ 직후 은행연합회와 금융투자협회 등 업권별 협회는 ‘23년 상반기 채용 계획’을 일제히 발표했다. 개별 회사의 채용 계획을 모아서 업권별 협회가 발표한 건 이례적이다.

양질의 일자리 창출에 목마른 당국의 입장을 반영하듯 금융권은 올해 상반기에만 4700여명을 채용하겠다고 했다. 은행권은 그 절반에 가까운 2288명의 채용 계획을 밝혔다. 1년 전보다 48% 늘었다. 뜬금없는 발표에 배로 급등한 숫자는 연간 목표치를 당겨온 듯한 합리적 의심까지 일게 할 정도다.

은행 과점을 깨기 위해 스몰 라이선스나 특화전문은행 등을 추진하겠다고 나섰던 금융당국은 당초 계획대로 개선방안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이다.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의 파산 사태가 드러낸 위험 등도 진지하게 검토해 방향을 정하겠지만, 일방통행식 진행은 더 큰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은행의 잘못된 관행을 개선하고 생산적인 결과를 도출하려면 이성적이며 냉정한 접근이 필요하다. 좋은 의도로 시작하더라도 국민의 공감이나 정서를 앞세운 주장은 논리 부재나 감정적 대응, 은행이나 금융권을 제멋대로 다루려는 비겁한 시도라는 오해를 사기 쉬울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