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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인사이드]갑자기 찾아온 기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무기를 개발하고 생산 시설을 유지하는데 비용을 많이 투입해야 하는 방산 업체는 장기간 평화가 지속되면 이익을 취하기는커녕 생존조차 어려운 경우가 흔하다. 그래서 전쟁은 피해 당사자에게는 무섭고 괴로운 일이나, 무기를 생산하는 이에게는 대단히 좋은 기회가 될 수밖에 없다. 예상치 못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대규모 공급 계약이 이루어진 K2 전차의 경우도 이에 해당되는 사례다.

 2022년 12월 6일 그디니아 항에 도착한 후 폴란드 안제이 두다 대통령의 환영을 받는 K2 전차와 K9 자주포. 그런데 K2는 지난해 초만 해도 관련 업체들이 정부에 특단의 대책을 요구할 만큼 양산에 어려움이 많았다. 폴란드 국방부

2022년 12월 6일 그디니아 항에 도착한 후 폴란드 안제이 두다 대통령의 환영을 받는 K2 전차와 K9 자주포. 그런데 K2는 지난해 초만 해도 관련 업체들이 정부에 특단의 대책을 요구할 만큼 양산에 어려움이 많았다. 폴란드 국방부

K2는 3세대 전차 중 상대적으로 늦게 탄생한 후발주자다. 출발이 늦은 대신 최신 기술들이 많이 접목해 성능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 별도로 3.5세대 전차로 구분된다. 그런데 K2가 배치를 시작한 2014년은 냉전이 종식된 지 20여 년이 넘어서 세계적으로 무기 수요가 대폭 줄어든 때였다. 어쩌면 우리나라의 특수한 안보 상황이 아니었다면 탄생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후 양산에 어려움이 많았다.

결국 K2는 좋은 성능에도 불구하고 해외 판매 시도가 성과를 내지 못한 데다 그나마 의지하던 내수마저 3차례에 걸쳐 총 260대를 도입한 뒤 향후 발주가 불투명해지자 생산업체인 현대로템은 고민이 컸다. 결국 지난해 초 폐업 위기에 몰린 많은 협력업체가 정부에 특단의 대책을 요구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었다. 일각에서는 생산을 종료하고 차기 전차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까지도 나왔다.

그러다가 폴란드와 직도입 및 현지생산을 포함해 총 980대의 계약이 성사되면서 문제가 일거에 해결됐다. 더불어 노르웨이 수출 건은 비록 실패했지만, 수출이 급했던 우리의 사정을 이용해 자국산 무기로 100% 절충 교역하겠다는 노르웨이의 곤란한 요구를 단호히 거부할 수 있었다. 노르웨이가 도입을 예정한 규모가 54대여서 굳이 무리해서 매달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다.

무기의 역사를 살펴보면 K2처럼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발판으로 업체가 크게 성공한 사례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20세기 중반에 P-51 머스탱, F-86 세이버 같은 성공작을 연이어 만들어 한때 전투기 분야의 최강자로 군림했던 노스아메리칸(North American Aviation)이 대표적이다. 1928년 창립된 노스아메리칸은 소규모 군용기 제작 업체였다. 당시에 미군은 규모가 작아서 수요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러던 1930년대 나치 독일을 비롯한 전체주의 국가들의 득세로 전운이 높아지자 사장 제임스 킨들버거(James H. Kindleberger)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자체 자금을 들여 NA-73으로 명명한 전투기 연구를 시작함과 동시에 미 육군항공대(현 미 공군)에게 채택을 제안했다. 그러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킨들버거는 실망하지 않고 경영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기술력을 더욱 갈고닦으며 기회를 기다렸다.

미 공군이 최고의 레시프로 전투기라고 주장하는 P-51의 프로토타입인 NA-73. 노스아메리칸이 자체 자금을 투입해 미리 연구를 진행했던 덕분에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기회가 찾아오자 곧바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위키피디아

미 공군이 최고의 레시프로 전투기라고 주장하는 P-51의 프로토타입인 NA-73. 노스아메리칸이 자체 자금을 투입해 미리 연구를 진행했던 덕분에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기회가 찾아오자 곧바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위키피디아

1939년, 독일이 체코를 강제 병합하자 영국은 유화정책을 포기하고 본격적인 전쟁 대비에 나섰다. 독일보다 전투기 전력이 뒤졌던 영국은 서둘러 스핏파이어의 양산에 착수했지만, 당장 수적 격차를 메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대안으로 미국에서 전투기를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미국은 중립이었지만, 영국에 호의적이었던 데다 무기의 상업적 거래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영국의 구매사절단은 당시 미군의 주력기인 P-40을 대상 기종으로 정했다. 그런데 P-40을 생산하던 커티스는 내수 물량을 대기에도 벅찬 상황이었다. 이에 구매사절단은 마침 B-25 폭격기의 판매를 영업하기 위해 찾아온 킨들버거에게 P-40을 하청 생산해 줄 수 있는지 문의했다. 생각지 않은 제의를 받은 그는 NA-73을 염두에 두고 넉 달의 시간만 준다면 P-40보다 더 뛰어난 전투기를 보여 주겠다고 역으로 제안했다.

밑질 것이 없다고 판단한 구매사절단이 제안을 수용하자 계약을 맺은 지 117일 만인 1940년 10월 26일, NA-73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검증에 착수한 영국은 성능이 요구했던 조건을 모두 상회하자 머스탱 Mk. I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예정보다 많은 320기를 주문했다. 고고도에서 성능이 저하되는 약점을 보였으나 영국산 롤스로이스 멀린 엔진을 장착한 이후 가히 최고의 전투기가 되었다.

1941년 일본에게 진주만을 급습당한 후 전쟁에 뛰어들었지만 좋은 전투기가 없어 고민하던 미국은 자신들이 이미 최고의 전투기를 가졌다는 사실에 놀랐다. 곧바로 NA-73은 P-51이라는 이름으로 미 공군의 주력기가 되었고 전설을 써 내려 갔다. 덕분에 과감히 배팅한 노스아메리칸은 세계적인 기업으로 우뚝 섰고, 전후에는 서방의 초창기 제트전투기 시대를 선도한 F-86을 개발해 시장에서 계속 우위를 이어갈 수 있었다.

폴란드 야전 부대에 배치된 K2. 개발 및 양산 과정 중에 있었던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유럽을 방어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폴란드 국방부

폴란드 야전 부대에 배치된 K2. 개발 및 양산 과정 중에 있었던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유럽을 방어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폴란드 국방부

아무리 전쟁 때문이라도 K2나 NA-73의 성공은 어려움 속에도 꾸준히 준비하고 노력한 결과다. 우리 방산의 과거를 모르는 외부에서는 오늘의 결과를 운이 좋았다고 보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정작 기회가 있어도 성공하지 못한 사례가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국 방산 기관이나 업체들은 수많은 좌절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준비를 해왔기에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에 만족하면 곤란하다. 당연히 앞으로도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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