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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징용 해법, 이젠 일본이 화답할 차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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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영준 국방대 국가안보문제연구소장

박영준 국방대 국가안보문제연구소장

대한민국 안보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대외적 자산 중 하나가 한·미동맹이다. 그런데 한·미동맹이 원활하게 기능하기 위해서는 그 후방의 미·일 동맹에 의한 뒷받침이 불가결하다. 한·미동맹과 미·일 동맹을 접착제처럼 긴밀하게 연계하는 것이 바로 한·일 협력관계다.

이처럼 중요한 한·일관계가 지난 수년간 최악의 상태를 면치 못했다. 2018년 10월 대법원에서 일제 식민지 시대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해 일본 기업이 직접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처음 나왔다. 즉각 일본 정부는 한국에 대해 “국제법을 지키지 않는 나라”라고 비판하며 판결에 반발했다. 당시 문재인 정부는 사법부 판결에 대해 행정부가 관여하는 것은 삼권분립 체제를 훼손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행정 소극주의로 일관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전략물자 수출 규제 등에 대응해서 한·일 안보협력의 근간인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파기 카드까지 꺼내 들었다.

한·일은 한미·미일 동맹 접착제
징용 갈등으로 양국 외교 위축
과거사에 대한 반성 이어가야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한·일관계가 급속히 악화하면서 한국의 외교적 지평이나 국제 안보네트워크가 크게 위축됐다. 일본이 미국·호주·인도 등과 쿼드(QUAD) 안보협의체를 결성해 국제안보적 역할을 확대하고 대외적 위상을 증진했다. 이에 반해 한국은 미국과의 정례적 연합훈련도 축소하고 전략적 모호성이란 방침에 따라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안보 네트워크에서도 고립돼 갔다.

지난 6일 윤석열 정부가 일제 강점기 징용 피해자들의 배상에 관한 해법을 발표한 것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려는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 기존의 징용 피해자들이 제삼자 변제 방식으로 배상금을 받도록 하고, 대외적으로는 몇 년간 표류해 온 한국의 안보와 외교를 정상화하겠다는 의지를 담아서다.

국제안보 질서는 5년 전보다 더욱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1년을 넘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은 글로벌 안보 질서에 불확실성을 키웠다. 미·중의 치열한 전략 경쟁 와중에 대만해협을 둘러싼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면서 한반도 안보정세에 직접적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농후하다. 북한은 연일 한·미 양국의 연합훈련 재개에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면서 미사일 도발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실질적 배상 방책을 강구하지 않고 대외적으로 한·일관계 악화를 방치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외교와 내치에서 무책임한 직무유기라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이번 결정은 연로한 징용 피해자와 가족에 대해 국가가 응분의 책임과 역할을 다하자는 취지다. 외교적으로도 한·일 관계를 회복해 우리 안보환경을 굳건히 하려는 포석에서 진행된 것이라 볼 수 있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은 국내 일각의 반대에도 국가발전이라는 큰 목표를 위해 한·일 국교정상화를 단행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은 역사문제 반성에 소극적이던 일본에 대해 과거사를 직시하면서도 미래를 지향할 것을 다짐한 한·일관계 공동선언, 즉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끌어냈다. 윤 대통령의 징용 해법 제시는 박 전 대통령과 김 전 대통령의 대일정책을 계승하는 외교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평가할만하다.

물론 일부 시민단체와 징용 피해자들이 정부의 해법을 수용하지 못하는 것은 안타깝다. 외교부를 포함한 관련 정부 부처는 이번 정책의 불가피성에 대해 지속해서 설명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무엇보다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의 결단에 대해 대담하게 호응하는 조치를 아직 표명하지 않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국내정치적 난관에도 대국적 견지에서 한·일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어려운 결정을 내린 윤 대통령의 결단에 대해 일본도 상응하는 조치를 내놓길 기대한다.

예컨대 식민 지배에 대한 반성 의사를 표명한 1995년 무라야마 담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정과 반성을 표명한 1993년 고노 담화, 그리고 2015년 아베 담화 등 역사 문제에 대한 기존 일본 정부의 입장을 일관되게 계승한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밝혀주길 바란다.

피해자 보상에 동참하려는 일본 기업들의 자발적 참가도 보장해야 한다. 일본 측의 호응은 향후 인도·태평양 지역의 안보와 번영을 위한 한·일 협력 재개 및 강화에 발판이 될 것이다. 윤 대통령의 이번 일본 방문과 정상회담을 계기로 일본이 화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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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준 국방대 국가안보문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