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서경호 논설위원이 간다

“정부의 강제징용 해법은 문제 해결의 끝이 아니라 시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4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제징용 해법 갈등, 어떻게 풀어야 하나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 11일 오후 서울 시청 광장 동편. 원내정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이 정의기억연대·민주노총·민변·전국민중행동 등 610개 단체로 구성됐다는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과 함께 ‘강제동원 굴욕해법 강행 규탄 및 일본의 사죄배상 촉구 2차 범국민대회’를 열었다. 경찰 추산 7000여 명이 참석했다. 지구당 깃발이나 파란색 풍선을 든 민주당 참석자가 많았고, 요즘 따가운 시선을 받는 건설노조 조직원도 눈에 많이 띄었다. ‘한미연합군사연습 중단하라’ 등의 플래카드도 보였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윤석열 굴욕외교 심판’이라 적힌 손팻말을 들고 연단 바로 앞에 자리를 잡았다. 이 대표는 연단에 올라 “굴욕적인 강제동원 배상안이 이대로 강행된다면 다음은 바로 한·일 군수지원협정 체결이, 그 뒤에는 한·미·일 군사동맹이 기다리고 있다”며 “연합훈련을 핑계로 자위대의 군홧발이 다시 한반도를 더럽히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의 군사·외교적 자율권이 제약된 상황에서 제2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생기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나”는 발언도 있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1905년 7월 미국과 일본이 필리핀과 대한제국에 대한 서로의 지배를 인정한 협약이다.

이날 연단에 오른 이들의 단골 비판 메뉴가 ‘대통령 40년 지기’ 석동현 민주평통 사무처장의 “지금까지 식민지배에 대해 배상하라고 악쓰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는 발언이었다. 눈치 없는 발언 하나가 집회에서 먹잇감이 됐다.

전문가들 “불가피한 차선책”
한국의 결단, 일본도 손 잡아야

대통령이 피해자 더 보듬었으면
‘한·미·일 협력’보단 미래 강조를

한·일, 망언 안 나오게 관리하고
힘들어도 국회서 특별법 제정을

11일 오후 서울 시청 광장 동편에서 열린 ‘강제동원 굴욕해법 무효 촉구 2차 범국민대회’에서 강제동원 피해자 동상 너머 참석자들이 묵념하고 있다. [연합뉴스]

11일 오후 서울 시청 광장 동편에서 열린 ‘강제동원 굴욕해법 무효 촉구 2차 범국민대회’에서 강제동원 피해자 동상 너머 참석자들이 묵념하고 있다. [연합뉴스]

# 강제징용 해법을 고민하는 토론회가 13일 두 곳에서 열렸다. 정의당 강은미 의원과 민주당 김홍걸 의원,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이 주관한 국회 토론회는 정부 해법에 매우 비판적인 분위기였다. 주말 집회의 연장선 같았다. 김홍걸 의원은 “최소한의 사과조차 하지 않고 ‘과거 내각의 입장을 계승하겠다’고 말하는 일본 정부인데, ‘과거 내각’이 어떤 내각일 줄 알고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언급하는지, 윤석열 정부가 한심하다”고 말했다.

이국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법원에서 소송을 진행한 2011년 12월 미쓰비시중공업이 작성한 합의문 수정안을 토론회에서 공개했다. 당시 수정안에는 미쓰비시중공업이 피해자들에게 ‘진심으로 유감의 뜻을 표한다’는 내용이 담겼지만, ‘강제동원·강제연행’ 문구가 없었다. 합의는 결렬됐다. 윤석열 정부의 해법이 12년 전 미쓰비시중공업이 제시한 수정안보다도 한참 후퇴했다는 거다.

반면 같은 날 현대일본학회가 프레스센터에서 주최한 토론회는 정부의 해법이 차선책이고 고육책이긴 하지만 미래를 위한 용기 있는 결단이었다는 평가가 많았다. 토론회에는 중도·보수 성향의 합리적인 일본 전문가들이 여럿 참여했다. 이들의 분석을 논점별로 정리했다.

①정부 대책, 부족하지만 가야 할 길

박철희 서울대 교수는 “일본 문제는 가만히 있으면서 비판만 하는 게 가장 편하다”며 “하지만 그래선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다”고 말했다. 장제국 동서대 총장(현대일본학회 회장)도 “(과거사 문제는)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않거나 여론에 단순 편승하면 쉽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큰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며 “정부가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고 평가했다.

일본에는 한일관계에서 원칙론을 양보하면 일본 전후(戰後) 처리 정책이 붕괴된다는 위기감이 있다. 심지어 일본 자민당은 ‘사죄는 더 이상 없다’는 기조를 아베의 공적으로 생각한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은 “일본이 1965년 한일기본조약의 원칙을 강경하게 고수하는 한, 피해자들이 원하는 해법은 달성하기 어렵다”며 “정부가 할 수 있는 차선의 선택을 한 것”이라고 했다.

②‘이재명 정부’였다면 달랐을까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11일 집회뿐 아니라 13일 민주당 대일굴욕외교대책위원회 출범식에서도 “일본은 하나도 양보하는 것이 없고, 우리 정부만 일방적으로 양보해 국민이 굴욕적인 수치심을 느끼게 했다”며 정부에 날 선 비판을 날렸다.

하지만 이재명 대선 캠프에 참여했던 한 외교안보 전문가는 “우리도 대위변제를 대안으로 검토했다”며 “다만,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의 취지는 훼손하지 않기 위해 전범기업에 구상권을 청구한다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가해자에게 일단 클레임을 걸어두는 차원에서다. 구상권을 행사할 생각이 없다고 언급한 지금 외교부와는 입장이 다르지만 3자 변제라는 구도는 비슷하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센터장은 “죽창가를 외쳤던 문재인 정부도 임기 말에는 한일 관계를 개선하려고 했다”며 “여야가 바뀌었어도 정부가 한일 관계 개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③공은 일본에 넘어갔다

한국이 국내 여론의 비판을 감수하며 애써 내민 손을 일본이 맞잡아야 한다는 데엔 이견이 없었다. 최은미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일본 정부는 보다 구체적인 표현으로 반성과 사죄의 마음을 보이며 성의 있게 호응해야 한다”며 “어려운 시기일수록 결단과 실행을 통해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 진정한 리더의 자세”라고 지적했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 등 역대 내각의 입장을 계승한다는 어정쩡한 말로는 부족하다. 아베 신조 전 총리는 2015년 전후 70년 담화에서 1931년 이후 침략전쟁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표명하면서도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 표현은 하지 않았다. 외려 후대에 사죄를 계속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런 아베의 입장까지 계승한다는 건가.

최희식 국민대 교수는 “일본의 호응 조치가 강제동원 해법 성공과 지속가능성의 열쇠”라며 “이번 해법이 실패하면 한일관계에 괴멸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기태 통일연구원 평화연구실장은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을 인용해 “일본인은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갚는다”며 한국의 결단에 부응하는 일본의 후속조치를 기대했다.

④정부, 피해자 보듬는 노력 더 해야

진창수 세종연구소 센터장은 “조속한 시일 내에 윤석열 대통령이 피해자들을 만나 이들의 마음을 사는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국내 불만이 커지면 한일관계 개선은 사상누각이다. 조윤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도 “대통령이 피해자들에게 직접 설명하고 ‘여러분의 희생 덕분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다’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일본 전범기업에 당했고 국가는 이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대통령이 사과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피해자가 만족할 대책을 내지 못한 데 대해 대통령이 미안함을 토로하고 국내 여론을 어루만지는 노력을 좀 더 했으면 어땠을까.

⑤제발 그 입 좀 다물라

‘강제 동원’이라는 표현이 적절치 않다는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의 발언이 피해자 감정을 염두에 두지 않은 민주평통 사무처장의 어록과 함께 11일 집회에서 자주 도마 위에 올랐다. 최희식 국민대 교수는 “한일 양국 모두 역사문제에서 부적절한 언행이나 망언이 나오지 않도록 자기관리를 잘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앞으로 교과서 검증, 후쿠시마 오염수 방출, 사도광산 유네스코 등재 등 민감 이슈가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미래세대에 안정적 한일관계 물려줘야

풀어야 할 문제가 너무 많다. 3자 변제를 거부하는 피해자에 법원에 공탁을 할 수 있느냐를 두고 벌써 논란이다. 대법원의 배상 확정판결을 받은 일제 강제징용 생존 피해자 3명 전원은 13일 정부의 ‘제3자 변제’를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법원이 공탁의 효력을 인정해도 결국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이 크다.

여야 대치 탓에 쉽지 않지만 국회가 합의하는 특별법으로 일제 강점기 피해자 대책을 만드는 노력은 계속해야 한다. 최희식 국민대 교수는 “강제동원 해법을 한·미·일 협력과 연계하는 논법은 진보의 외교전략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인식돼 야당의 전면적 반대를 유발한다”며 “강제동원 해법의 미래지향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담론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괜히 큰 싸움 만들 필요는 없다. 미래세대에게 안정적인 한일관계를 물려줄 의무가 기성세대에게 있다.

박철희 서울대 교수는 “이번 대책은 문제 해결의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라며 “이제까지 ‘최종적, 완전해결’을 선언했던 모든 정책은 다 실패했다”고 했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으니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대일 정책을 ‘프로세스’로 보자는 조언이었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가 최근 중앙SUNDAY 인터뷰에서 “징용해법은 완결형이 아니고 진행형”이라고 한 맥락과 일치한다. 내일 한일 정상회담만 있는 게 아니라 5월 히로시마 G7 회의 등 외교 무대가 줄줄이 이어진다. 한국의 결단으로 협상력이 커졌다. 성과를 내야 가시밭길을 가야 하는 징용 해법의 지속가능성도 보장된다. 윤 대통령이 말한 국익과 미래도 거기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