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북핵 해결 기회 두 번 놓쳐...미사일·잠수함 대대적 확충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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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장세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북한의 핵 위협과 잦은 미사일 도발에 둔감해져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3월 12일은 북한이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갑자기 선언한 지 꼭 30년 되는 날이다. 북한은 1985년 NPT에 가입했으나 1993년 탈퇴 선언 이후 미국과의 협상 도중에 탈퇴 효력을 중지하더니 결국 2003년 2차 핵위기 때 다시 NPT 탈퇴를 선언했다.

[30년전 북한 NPT 탈퇴 선언, 38년 '핵 외교관' 이용준의 북핵 해법] #3대 세습 정권의 핵 집착 불변 #한국은 정부마다 제각각 대처 #외교협상 매달리다 호기 놓쳐 #5차례 남북정상회담도 물거품 # #미사일망 강화, 잠수함 증강 등 #압도적 비대칭 전력 확보해야

북한의 NPT 탈퇴 선언으로 1차 북핵 위기가 촉발된 1993년부터 핵 무력 완성을 선언한 2017년 11월까지 지난 30년간 대한민국 대통령은 모두 6명이었다. 각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라고 취임선서를 했다. 하지만 누구도 북핵을 막지 못했다.[중앙포토, 연합뉴스, 대통령기록관]

북한의 NPT 탈퇴 선언으로 1차 북핵 위기가 촉발된 1993년부터 핵 무력 완성을 선언한 2017년 11월까지 지난 30년간 대한민국 대통령은 모두 6명이었다. 각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라고 취임선서를 했다. 하지만 누구도 북핵을 막지 못했다.[중앙포토, 연합뉴스, 대통령기록관]

 이후 북한은 6자회담과 북·미 대화에 나올 때도 뒤에서 몰래 핵 무장을 가속해 2017년 6차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를 거쳐 핵 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북한은 3대 세습 체제에서 끝내 핵을 보유했고, 한국은 비핵화에 철저하게 실패해 핵 위협 앞에 국가안보가 위협받는 처지다.

 이용준(67) 한미협회 상근부회장은 외교관 경력 38년 중 대부분을 북한 핵 문제와 씨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북핵과 '악연'이 깊다. 외무고시 13회로 1979년 외교부에 들어간 이래로 청와대 남북 핵 협상 담당관, 주미 대사관 북핵 담당관, 경수로 협상 대표, 외교부 북핵외교기획단장, 6자회담 차석 대표, 북핵 담당 대사, 외교부 차관보, 말레이시아 및 이탈리아 대사 등을 역임했다. 북핵의 '알파와 오메가'가 궁금했다.

이용준 한미협회 상근부회장이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북핵 30년의 막전막후를 들려주고 있다. '북핵 담당 대사' 등을 역임한 그는 38년 외교관 경력 대부분을 북핵 문제와 씨름했다. 『북핵 30년의 허상과 진실 』『북한핵, 새로운 게임의 법칙 』『대한민국의 위험한 선택 』등을 출간했다. 김경록 기자

이용준 한미협회 상근부회장이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북핵 30년의 막전막후를 들려주고 있다. '북핵 담당 대사' 등을 역임한 그는 38년 외교관 경력 대부분을 북핵 문제와 씨름했다. 『북핵 30년의 허상과 진실 』『북한핵, 새로운 게임의 법칙 』『대한민국의 위험한 선택 』등을 출간했다. 김경록 기자

1990년대 초에 강력 대응했어야
 -NPT 탈퇴 선언 이후 30년 만에 북핵 위협에 노출됐다.
 "외교관으로서 가장 오랜 시간을 투자한 북핵 문제 해결에 실패해 면목이 없다. 북한이 궁지에 몰렸던 1990년대 초에 강력히 대응해 핵 개발을 종식했어야 했는데 안타깝다. 때로는 한·미 간 이견 때문에, 때로는 국내정치적으로 발목이 잡혀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일부 정권은 남북관계 진전 의지가 너무도 강해 경제 지원으로 북한의 환심을 사는 데만 관심이 있었고, 북핵 문제를 한국이 아닌 미국의 문제인 양 여겼다. 그런 분위기에서 강력한 북핵 대응은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이제 북한은 사실상 핵보유국인가.
 "다른 나라들이 인정하든 안 하든 핵무기를 실제로 보유하면 엄연한 핵보유국이다. 북한은 핵무기 수십 개를 보유한 핵보유국이고, 지난 30년에 걸친 국제사회의 저지 노력은 완전히 실패했다. 불법적 핵보유국이 되면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을 뿐이다."
 -협상을 통한 북핵 해결은 이제 불가능한가.
 "외교적 협상을 통한 비핵화 노력은 2019년 미·북 하노이 정상회담으로 막을 내렸고, 협상을 통한 비핵화가 더는 가능하지 않다. 2017년 ‘핵무력 완성 선언’ 이후 북한은 핵능력의 부분적 감축과 제재조치 전면해제를 교환하는 방식의 핵군축 협상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부분적 핵군축은 북한의 핵무장을 공인하고 영구화하는 최악의 협상 방식이다. 핵군축은 쌍방이 핵을 갖고 있을 때 의미가 있을 뿐이다. 북한 핵무기가 50개든 5개이든 북핵 위협엔 아무 차이가 없고 추후 추가생산을 막을 방법도 없다."

2월 8일 북한군 건군절 75주년 열병식에 등장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7형’. [연합뉴스]

2월 8일 북한군 건군절 75주년 열병식에 등장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7형’. [연합뉴스]

1994년과 2003년, 두 번의 기회
 -기회가 있었을 텐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됐나.
 "가장 좋은 기회는 두 번 있었다. 첫째는 1993년 초 북한의 NPT 탈퇴 이후 1994년 미·북 제네바 합의까지 1년간이었다. 둘째는 북한의 비밀 우라늄 농축 활동으로 제네바 합의가 파기된 2002년 말부터 2003년까지 1년간이었다. 하지만 끝없는 외교협상에만 집착하다 기회를 놓쳤다. 1994년 제1차 북핵 위기 당시 김영삼 정부가 북한의 전쟁불사 협박에 굴복해 미국의 유엔제재 추진과 군사적 압박 움직임을 막았고, 2002~2003년 제2차 북핵 위기 당시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대북한 압박이나 응징보다 미국의 강력한 대응을 견제하는 데 중점을 뒀다. 당시에 강력한 대북 제재를 취했다면 결과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2017년 6차 핵실험과 ICBM 도발 직후도 기회 아니었나.
 "1994년과 2003년에는 북한이 아직 핵무기를 몰래 개발하는 단계였기 때문에 강력한 경제적·군사적 압박으로 중단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차례 미·북 정상회담이 개최된 2018~2019년은 핵실험이 6차례나 실시되고 일부 핵무기가 실전배치된 단계여서 상황이 전혀 달랐다. 이미 핵무장한 북한을 비핵화하는 것은 북한의 핵무장을 막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당시 중국과 러시아도 유엔의 대북 제재 결의에 동참했으나, 비핵화 압박에 협조하기보다는 강경했던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한 군사행동을 막고 외교적 숨통을 터주려는 의도였다고 본다."
 -2018년 문재인 정부는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확인했다”며 북·미 정상회담을 중재했다.
 "문 정부가 북한의 입장을 잘못 해석한 것인지 자신의 희망사항을 미국에 전달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표명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북한은 김정일 시대 이래 비핵화가 협상 대상이 아니라고 일관되게 공개적으로 주장했고, 문재인 정부 시절 그 입장이 바뀐 것도 아니다. 핵협상 타결에 가장 근접했던 1994년 제네바합의 때도 북한은 단지 영변 핵시설 폐기에만 동의했을 뿐 이미 추출된 핵무기용 핵물질 폐기는 거부했다."

2000년 6월 14일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남북정상간 합의문에 서명하기에 앞서 두손을 맞잡아 들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00년 6월 14일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남북정상간 합의문에 서명하기에 앞서 두손을 맞잡아 들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07년 10월 4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남북공동선언문에 서명한 뒤 손을 맞잡아 들어 올리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07년 10월 4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남북공동선언문에 서명한 뒤 손을 맞잡아 들어 올리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18년 9월 20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백두산 천지에서 두 손을 맞잡아 들어 오리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2018년 9월 20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백두산 천지에서 두 손을 맞잡아 들어 오리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이스라엘의 확고한 의지 참고해야
 -북한이 핵보유국이 되는 동안 대통령들은 뭐했나.
 "북핵 문제에 대한 방침이 정권 성향에 따라 크게 달랐다. 김대중·노무현·문재인 대통령 시절에 정상회담을 다섯 차례 했다. 정상선언 때마다 보여주기식으로 원칙적·절충적 비핵화 문구를 넣었지만, 구체적 논의도 실질적 해법도 없었다. 북핵 해결을 위한 중요한 계기가 도래할 때마다 불운하게도 당시 한국 정부는 북핵을 한국의 문제가 아닌 미국의 문제로 간주하고 남북관계에만 연연하는 좌파 정부들이었다. 김영삼 정부도 집권 초기 이인모 북송, 대북 식량지원 확대 등 진보적 대북정책에 매몰돼 귀중한 기회를 놓쳤다.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 때는 북핵 문제가 사실상 동면 상태였다."
 -'북한 대변인'처럼 북핵을 두둔하는 세력이 있다.
 "이스라엘은 이란·시리아 등 적대국의 핵 무장을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저지하려는 확고한 결의가 있다. 그러나 한국은 북한의 핵무장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일관된 공감대가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정부와 정치권 일각이 남북관계 진전에 과도하게 집착하니 그와 상충하는 북핵 문제는 뒷방 신세가 되기 일쑤였다. 안보 정책과 북핵 대책이 대북 유화정책의 볼모나 희생양이 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항공모함보다 잠수함이 효과적
 -가장 현실성 있는 대책은.
 "전술핵 재배치, 나토식 핵 공유, 자체 핵무장 등 다양한 핵 억지력 보유 방안이 제기되지만 당장 실현 가능한 묘안이 없다. 북한 정권이 사라지지 않는 한 핵을 가진 북한과 핵이 없는 한국의 대치 상태가 장기간 지속할 것이다. 이런 현실을 토대로 대책을 모색해야 한다. 북핵에 대비한 가장 현실적 조치는 초보 단계인 한국형 미사일 방어망을 미국·일본·이스라엘 수준으로 대폭 강화하는 것이다. 북한의 어떤 미사일 공격도 차단할 수 있는 방어 시스템을 갖추는 일이다. '사드 3불' 족쇄를 풀고 사드를 추가 배치해야 한다. 이스라엘식 아이언돔도 속히 설치해야 한다.
 -비대칭 전력으로 미사일 1만발, 잠수함 확충 주장도 나온다.
 "북한을 압도할 만한 수준의 재래식 군사력 확충은 실질적 억지력이 될 수 있다. 북한도 한국의 재래식 군사력을 우려해 소형 전술핵무기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 군의 공격용 미사일과 방어용 미사일 숫자(현재 1000~2000기 추정)를 4~5배 대폭 증강하면 북한도 중국도 한국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다. 항공모함과 핵잠수함 만들 예산이 있으면 재래식 잠수함(현재 약 20척 추정)을 더 만들자. 이지스함 추가 건조와 해상 미사일방어망 구축도 시급해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0일 해군 특수전전단을 방문해 총을 겨누고 있다. 윤 대통령은 해군사관학교 졸업 및 임관식에 참석해 "무엇보다 강한 국방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래야만 상대방의 선의에 기대는 '가짜 평화'가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국가 안보를 지키는 '진정한 평화'를 구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0일 해군 특수전전단을 방문해 총을 겨누고 있다. 윤 대통령은 해군사관학교 졸업 및 임관식에 참석해 "무엇보다 강한 국방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래야만 상대방의 선의에 기대는 '가짜 평화'가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국가 안보를 지키는 '진정한 평화'를 구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부속〉

6·25전쟁 때 싹튼 핵 야망…북한의 핵무장 70년 '도박'

북한 정권이 핵무장 야망을 꾸기 시작한 것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의 핵 공격 위협에 떨었던 김일성 주석은 조선과학원 산하에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했다. 1956년 '조·소 원자력 협정'을 체결하면서 본격적으로 소련의 물자와 기술을 지원받는다. 1964년 중국의 핵실험 성공 직후 핵기술 지원 요청이 거부당한 김일성은 1972년 비밀 핵 개발을 지시했다. 1983~1991년 무기급 플루토늄 추출을 위해 고폭실험을 70여 차례 진행했다.

 북한의 핵 문제가 최초로 국제사회에 공개돼 현안으로 떠오른 것은 프랑스 상업위성이 영변 핵시설 사진을 공개한 1989년 9월이었다. 미국의 막후 압력으로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1992년 1월 북한과 '핵안전협정'을 체결하고 그해 5월 핵 사찰을 실시했다.
 그에 앞서 1991년 12월 13일 남북고위급회담에서 화해·불가침·교류협력 등에 관한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됐다. 이듬해 2월 19일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발효됐지만, 북한의 NPT 탈퇴로 의미가 퇴색했다. 주한 미군의 전술핵은 철수했지만, 북한은 속속 핵무장의 길로 치달았다. 길게는 1952년부터 약 70년, 짧게 잡아도 NPT 탈퇴 선언 이후 30년 만에 북한은 핵보유국을 자처하고, 한국은 핵 위협 앞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안은주 인턴기자가 인터뷰 정리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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