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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희지·김정희…명필들의 필체를 관통하는 비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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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지난 9일 서울 광화문 사무실에서 만난 미술품 감정가 이동천씨. 그는 최근 서예 비법을 담은 책 『신(神) 서예』를 펴냈다. 강정현 기자

지난 9일 서울 광화문 사무실에서 만난 미술품 감정가 이동천씨. 그는 최근 서예 비법을 담은 책 『신(神) 서예』를 펴냈다. 강정현 기자

왕희지·저수량·김정희 등 시대와 국적이 다른 서예 대가들의 필체를 관통하는 비법이 있을까. 이들의 글씨를 재현할 수 있는 방법을 담았다며 도전장을 내민 책이 있다. 서예가이자 미술품 감정가인 이동천(58)씨가 펴낸 『신(神) 서예』다.

이씨는 감정가로 일하며 20년 넘게 희귀 도판 등 자료를 국내외에서 모으고, 지난 4년간 집필에 전념했다. 과거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 천경자의 ‘뉴델리’ 등을 위작이라고 주장해 감정학계에 파장을 일으켰던 그가 이번엔 서예판에 승부수를 던졌다. 지난 9일 이씨를 서울 종로구 사무실에서 만났다.

이씨가 쓴 책의 요체는 크게 전번필법(轉飜筆法)과 신경필법(神經筆法)이다. 전번필법은 붓을 굴리면서 뒤집는다는 뜻으로, 붓의 앞면과 뒷면을 모두 사용하는 방법이다. 이씨는 붓의 앞면에 살구색, 뒷면에 연두색 스티커를 붙이고 ‘한 일(一)’자를 그렸다. 연두색 면이 정면을 향한 채로 붓을 긋다가 중간에 붓면을 뒤집어 살구색 면이 앞으로 오게 한 다음, 다시 뒤집어 마무리하는 식이다. 이씨는 명필들의 글씨에서 전번필법을 사용한 흔적을 추적했다. 또 붓을 어디서 어떻게 굴리고 뒤집어야 하는지를 ‘붓면 도형 표시법’을 이용해 책에 담았다.

이씨는 서예 작품 속 전번필법의 흔적을 '붓면 도형 표시법'을 이용해 설명했다. 사진 라의눈 제공

이씨는 서예 작품 속 전번필법의 흔적을 '붓면 도형 표시법'을 이용해 설명했다. 사진 라의눈 제공

전번필법이 붓을 다루는 기술이라면, 신경필법은 붓을 대하는 영성(靈性)의 영역이다. 붓끝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힘을 줘야 글씨에 생동감이 담긴다고 이씨는 설명한다.

“붓을 굴릴 때 그냥 돌리기만 하면 힘이 빠집니다. 마치 빨판이 종이를 흡착하듯, 붓으로 종이를 뽑아내듯 뒤집는 거죠. 붓끝에 제 신경을 불어넣는 거예요. 힘을 다해 쓰다 보면 붓대가 부러지기도 하죠.”

그는 미술품 감정가로 먼저 이름을 알렸지만 어릴 적부터 서예를 배워 글씨에 조예가 깊다. 전라북도항교재단 이사장이었던 아버지 만초 이태연 선생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집엔 당대 유학자와 서화가들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27세 되던 해 천자문을 써 책을 펴냈고, 수십년간 명필의 글을 연구했다. 서호 전 통일부 차관, 손열 동아시아연구원장, 함세웅 신부 등이 그의 서예 제자다.

이씨가 쓴 글 '한국판 뉴딜'은 2020년 11월 청와대가 주재한 제3차 한국판 뉴딜 전략회의 당시 배경으로 사용됐다. 사진 라의눈 제공

이씨가 쓴 글 '한국판 뉴딜'은 2020년 11월 청와대가 주재한 제3차 한국판 뉴딜 전략회의 당시 배경으로 사용됐다. 사진 라의눈 제공

1993년 중국으로 유학한 이씨는 감정학을 배우고 싶어 당시 랴오닝성 박물관에서 일하던 양런카이(楊仁愷)에게 편지를 보냈다. 양런카이는 서화 감정 최고 권위자로 ‘국가의 눈(國眼)’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의 제자로 공부하다 중국 국학의 대가 펑치융(馮其庸)에게 문헌 고증학을 사사했다. 1999년 중국 중앙미술학원 박사 학위를 받고 2001년 귀국해 명지대에 국내 첫 예술품 감정학과를 개설했다.

이씨가 발견했다는 두 필법은 기존 서예 학계엔 없던 개념이다. 비판이 예상된다는 말에 그는 “당연하다”고 답했다.

“저도 새로운 검증 대상이 돼야죠. 왕희지의 글씨를 따라 쓰고 싶다면, 제가 발견한 방법으로 써보라는 거에요. 의심된다면 기존의 방법으로도, 제 방법으로도 써보고 비교해보라는 겁니다.”

감정가인 그가 수십년간 서예 비법에 골몰하고 책을 쓴 이유가 뭘까. 그의 답은 명료했다.

“어떤 발견을 통해 비주류가 주류가 될 때 비로소 역사가 됩니다. 제 책이 서예사에 새 역사가 될 수도 있다는 사명감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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