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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세컷칼럼

한·일 협상의 백그라운드…지금부터 시작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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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훈 기자 중앙일보 주필

“한·일 협상은 자산이 아니라 늘 부채다.” 외교가의 금언 중 하나다. 잘해 봐야 본전, 협상 당사자들엔 대부분 치명타였다. 이번 강제징용 ‘제3자 변제’ 해법 역시 여론(7~8일, 매일경제)은 ‘잘못했다’ 57.9%, ‘잘했다’ 37.8%다. 반면 ‘일본과의 관계개선이 필요하다’는 67.0%, ‘필요 없다’는 37.3%다. 2015년 말 위안부 협상 직후에도 “잘됐다” 26%, “잘못됐다”는 2배 이상인 56%였다. 참 어렵고 복잡 미묘하다.

일본의 입장은 강경했다. 위안부 협상 때는 미국이 일본을 압박도 해가며 적극 중재에 나섰다. 하지만 이번엔 미국도 기대 속에 지켜보기만 했다는 협상팀의 전언이다. 특히 포스트 기시다의 유력 주자인 자민당의 모테기 간사장이 “물러서지 말라”는 입장을 고수했다고 한다. 기시다 총리도 혐한 정서가 강한 범아베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 협상팀은 이런 얘기를 반복했다. “뭘 합의해 봤자 4년 뒤 한국에 다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 다시 다 뒤엎을 텐데 무슨 소용 있겠는가.” 문재인 정부의 박근혜 정부 위안부 협정 파기를 계속 환기했다. “골대가 매번 바뀐다”였다.

“일단 법적인 문제부터 매듭 풀고
전방위 교류 확산과 성과의 수순”
물꼬 주역 자임한 윤석열 대통령
야당 포함 국민 설득이 성공 관건

다시 용산 대통령실. 시간이 흘러가면 우리도 총선 정국이다. 사안의 인화성이 커져갈 수밖에 없다. 중도 온건 성향인 기시다 총리 때 풀고 가는 게 낫고, 그 시기는 지금이라는 게 현실적 판단이었다. 그다음 해법의 디테일에 대한 윤석열 대통령의 생각은 이랬다고 한다. “이건 대법원 판결이라는 법적으로 제기된 문제다. 법적으로 초래된 문제가 양국의 안보·경제적 장애물로 에스컬레이트된 사안이다. 근원인 법적 문제를 먼저 풀어놓고, 차후 다른 영역의 양국 관계 진전으로 이어가야 한다.”

2018년 사법부가 강제징용 피해자 소송을 놓고 거래를 시도했다는 사법농단 사건 당시 외교부를 압수수색한 중앙지검장은 윤 대통령이었다. “당시 지검장인 윤 대통령이 외교부의 강제징용 관련 기록과 자료, 내용을 정독했던 것으로 안다”고 용산 관계자는 전했다. 강제징용 위자료 배상은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과 무관하다는 2012년 김능환 대법관의 판결은 이 모든 사태의 출발점. 윤 대통령은 당시의 부심 대법관에게 “그때 어떤 법적 근거와 논리로 이 판결이 나왔느냐”고 직접 물어보기도 했다는 전언이다. 돌아온 답은 “퇴임하는 김능환 선배의 마지막 판결이라 한 번 도와줬다”였다. 어이없는 과정이 아닐 수 없다.

반도체도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사실 미국이 반도체 공정에서 일본·네덜란드를 핵심 파트너로 삼으려는 전략이 포착됐다”며 “경쟁력 있는 일본의 반도체 제작 장비·소재·부품 분야와의 한·일 공조가 시급하다는 기업들 요청이 적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글로벌 공급망이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끼리로 재편되는 새로운 필요도 작용한 셈이다.

꼬인 매듭의 마지막을 자른 건 결국 윤 대통령 몫이었다. “제3자 변제로 법적 문제부터 해결한다. 우리가 주도를 해나가려다 보면 더 양보했다는 감정적, 정치적 저항도 많을 것이다. 다 안다. 하지만 먼저 주도적으로 해결해 나가다 보면 일본이 호응해 오는 걸 이끌어낼 자신이 있다. 법적 문제를 풀고 안보, 교역·투자·신기술의 경제협력, 문화·청소년 교류 등 많은 분야의 관계 진전으로 성과를 한번 내보겠다. 내 책임으로 해결해 보겠다. 물어보면 내가 지침 준 것이라 하라.” 협상 관계자들이 전한 취지였다.

일본 측도 변해 가는 기류다. 윤 대통령의 방일을 맞을 일한의원연맹 회장은 10년을 역임한 누카가 전 재무대신에서 스가 전 총리로 최근 격상됐다. 주요 언론들 역시 “양국 정부가 마음을 열고 지속적 협의를 통해 현안을 하나씩 돌파하자”(요미우리), “한국의 조치를 맞아 일본의 수출 통제 조치를 복원하는 게 합리적”(닛케이), “양국의 미래세대 지원기금에 일본 기업들이 기부한다면 한국 내 반대도 누그러질 것”(아사히) 이란 반응이다. “우리도 징용 피해 지원 재단에 기여하겠다”는 주한미국상공회의소의 조치도 눈길을 끌고 있다.

변수는 일본 정부의 과거사 관련 입장. 한국 측이 가장 선호해 온 건 “한국인들의 뜻에 반한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나라를 빼앗기고”라는 문구가 들어간 간 나오토 전 총리(민주당)의 2010년 담화. 반면 현 자민당 정권이 민주당의 입장을 계승한다는 데 어려움을 표하면서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계승하는 ‘윤석열-기시다’의 새 선언이 관측되고 있다.

정상화의 시작은 지금부터다. 과거 위안부 협정 직후 “일본이 잃은 건 10억 엔 뿐”이라는 일본 외상의 발언은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정치적 망언이야말로 판을 깰 뇌관이다. 양국 모두 차분히 큰 성과로 키워가려는 미래지향, 대승적 안목이 필요한 시간이다. 큰 방향 물꼬의 주역을 자임한 윤 대통령 역시 성과를 위해선 야당을 포함한 국민과의 소통에 적극 나서야 옳다. 성공하는 대통령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설득’이다.

글=최훈 주필  그림=김아영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