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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0만원 받고 1억 빚더미...대출사기 공범까지 된 20대 사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대구의 4년제 대학을 자퇴한 뒤 A씨(22)는 지난해 2월 같이 살던 지인으로부터 “더는 같이 살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급전이 필요했던 A씨는 페이스북에서 ‘손 쉬운 대출’ 광고를 클릭했다. 오픈채팅방 상담원이 안내한 휴대전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대출 알선업자라는 B씨(29)는 수화기 너머로 “전세 임대차계약서를 작성하면 정부 지원 전세자금 대출을 받을 수 있다. 일정 수수료를 제외하고 목돈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한국주택금융공사 무주택청년 특례전세자금보증 안내. HF 홈페이지 갈무리

한국주택금융공사 무주택청년 특례전세자금보증 안내. HF 홈페이지 갈무리

이후 춘천에서 B씨(29)를 만난 A씨는 이곳에서 B씨가 소개한 주택 임대인과 전세 임대차계약을 맺었다. 춘천 퇴계동 아파트 집주인이라는 30대 여성과 2년간 전세보증금 1억원을 주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긴 했지만, A씨는 퇴계동 아파트의 집이 어딘지도 몰랐다. 실제 입주는 하지 않고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허위 전세 임대차계약을 맺은 것이다. 그러나 한국주택금융공사(HF)의 무주택 청년 특례전세자금 1억원을 대출 받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불과 일주일 만에 대출금 1억원이 임대인 명의 계좌를 통해 B씨에게 건네졌다. A씨는 수수료를 제외한 3200만원을 송금받았다.

허위로 임대차계약서를 작성하면 정부지원 청년 전세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꼬드김에 넘어가 대출을 받았다가 매달 수십만원씩 이자를 부담하고 있는 A씨의 카카오뱅크 이자 납입 내역. 제보자 제공

허위로 임대차계약서를 작성하면 정부지원 청년 전세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꼬드김에 넘어가 대출을 받았다가 매달 수십만원씩 이자를 부담하고 있는 A씨의 카카오뱅크 이자 납입 내역. 제보자 제공

A씨는 14일 “당시 B씨에게 ‘왜 내 이름으로 1억원을 대출받았는데, 이것 밖에 안 주냐’고 물어봤더니 강압적인 말투로 ‘그동안 들어간 돈이 얼만 줄 아느냐’고 화를 냈다”며 “혹여라도 부모님이 도와주지 않아 갚지 못하면, 파산 신청을 하면 된다더라”고 말했다. 지금은 고향으로 돌아가 카페 매니저 일을 하며 하루도 살아보지 않은 전세 집 보증금 이자를 갚고 있는 A씨는 “너무 후회스럽다. 처음 이자는 19만원 정도였지만 지금은 금리가 올라 한 달에 28만원씩 갚고 있고, 내년 3월이면 1억원을 다 갚아야 한다”며 “사기 피해자라고 주장해도 사기 공범으로 엮인다. 말 그대로 작업대출이었는데, 목돈을 준다고 해서 앞뒤 안 가리고 하란 대로 했다가 범죄자가 됐다”며 후회했다.

정부지원 청년 전세대출을 받으면 수천만원 목돈을 주는 이른바 '작업 대출'에 이용된 수원시 영통구 망포동의 한 도시형생활주택 건물. 손성배기자

정부지원 청년 전세대출을 받으면 수천만원 목돈을 주는 이른바 '작업 대출'에 이용된 수원시 영통구 망포동의 한 도시형생활주택 건물. 손성배기자

사건을 수사한 경기남부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는 B씨 등 대출 알선책 5명을 사기 혐의로 구속하고, A씨 등 임차인과 허위 임대인 등 37명을 공범으로 불구속 입건했다고 14일 밝혔다. 구속된 알선책 중 1명은 당초 임차인으로 가담했다가 알선책으로 역할을 바꿨다. 한국주택금융공사(HF)의 무주택 청년 특례전세자금 보증제도는 무주택 청년들에게 1금융권 은행이 시중보다 낮은 2~3%대 금리로 최대 1억원까지 전세자금 대출을 해주면 HF가 이를 보증하는 제도다. 취약계층을 위해 마련된 정책금융 상품이 사기에 악용된 것이다.

B씨 등은 2021년 10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인천·수원·부천·안산·양주 등 수도권 일대와 춘천 등에서 이같은 대출 사기를 벌인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이 파악한 피해 규모는 21건(미수 4건 포함)에 피해액은 17억원 규모다. 대출 받은 전세 보증금은 임차인에게 채무로 고스란히 남지만, A씨 처럼 생활비가 급한 19~24세 사회초년생들이 다수가 가담했다가 범법자가 됐다고 경찰은 전했다. B씨 등 대출 알선책은 확보한 대출금 대부분을 임대인과 나눠가졌다.

정요섭 경기남부경찰청 강력범죄수사1계장이 14일 수원 장안구 강력범죄수사대 브리핑룸에서 '허위 임대차 계약 이용 정부지원 전세자금 대출 편취 사범' 사건을 설명하고 있다. 손성배기자

정요섭 경기남부경찰청 강력범죄수사1계장이 14일 수원 장안구 강력범죄수사대 브리핑룸에서 '허위 임대차 계약 이용 정부지원 전세자금 대출 편취 사범' 사건을 설명하고 있다. 손성배기자

사기 대출에 가담한 집주인들도 대다수가 급전이 필요한 중장년층이었다. 이들은 본래 본인 명의로 보유한 주택이 없었지만, 매매가와 전세보증금의 차이가 거의 없는 소위 ‘깡통주택’을 무자본으로 매입한 뒤 청년 임차인을 구해 대출을 받게 하고 수수료를 주겠다는 알선책 제안에 움직였다가 사기 피의자로 입건됐다. 경찰 관계자는 “허위 전세 계약을 통한 정부 지원 대출 사기는 단순히 가담만 해도 범죄 공범으로 입건될 뿐 아니라 대출금을 변제해야 할 의무가 생긴다”며 “HF 등과 협업 체계를 구축해 제도 개선 건의를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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