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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변양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노무현 "내 인생을 바꾸라는 거냐"…말투 지적 받자 격분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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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주정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변양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진영을 넘어 미래를 그리다 〈23〉 100번도 넘었던 식사 자리

변양균 전 기획예산처 장관

변양균 전 기획예산처 장관

“밥을 같이 한다는 건 삶을 같이 한다는 것”이라고 한다. 오인태 시인이 쓴 ‘혼자 먹는 밥’이란 시의 한 구절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나는 밥을 같이 먹은 것만 100번이 넘는다. 일일이 세어보지 않아서 그렇지 150~200번이 될지도 모른다. 노 대통령은 일주일에 절반 이상은 외부 손님을 초청해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내가 청와대 정책실장을 할 때는 대부분 내가 배석자로 참석했다. 둘이서 따로 밥을 먹은 적도 많았다.

그러면서 노 대통령과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눴다. 이 글을 연재하기 전까지는 어떤 대화를 했는지 외부에 공개한 적이 없다. 예전엔 보안 때문에 밝히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이제는 비밀이라고 할 정도는 아닐 것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어떤 정책을 폈는지는 각종 자료에 기록이 다 남아 있다. 하지만 그런 정책을 결정한 배경은 알려지지 않은 게 많다. 노무현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고민을 했는지 알아야 그의 정책도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재보선 피한 정동영에 아쉬움
“희생할 용기 없인 대선 못 이겨”
야당 대선 경선 MB 승리 바라
“기업인 출신이라 융통성 있다”

변양균 총리론에 “젊은 사람 걱정”

2006년 4월 14일 변양균(왼쪽에서 셋째) 기획예산처 장관이 모성보호실 개관식에서 직원들과 축하 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사진 변양균]

2006년 4월 14일 변양균(왼쪽에서 셋째) 기획예산처 장관이 모성보호실 개관식에서 직원들과 축하 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사진 변양균]

노 대통령의 인사와 관련해서도 알려지지 않은 얘기가 적지 않다. 2006년 3월 나는 기획예산처 장관을 맡고 있었다. 그 무렵 이해찬 총리가 물러나고 여당(열린우리당)으로 복귀하기로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후임으로 행정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원했다. 어느 날 이광재 의원과 박남춘 청와대 인사관리비서관에게서 연락이 왔다. 박봉흠 전 기획예산처 장관과 저녁을 함께하자고 했다.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박 전 장관에게 후임 총리를 맡아달라고 권했다. 행정부를 원활하게 이끌어갈 적임자란 얘기였다. 사전에 노 대통령과도 교감이 있었을 것이다. 박 전 장관은 완강하게 거절했다. “암 치료를 계속 받고 있습니다. 총리라는 격무를 감당하기에는 무리입니다.” 그렇게 결론을 내지 못하고 헤어졌다.

얼마 뒤 같은 사람들이 다시 만났다. 이번엔 나에게 총리를 권했다. 나는 사양했다. “행정만 안다고 총리를 잘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다른 참석자들은 기다려 보라고 했다. 그런데 노 대통령이 난색을 보였다. “그렇게 젊을 때 총리를 하면 앞으로 그 사람 인생이 걱정됩니다.” 나중에 전해 들은 노 대통령의 말이었다. 나로선 다행스러웠다. 그러면서 ‘내가 그렇게 어려 보이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나는 57세였다.

결국 후임 총리로 한명숙 전 환경부 장관이 내정됐다. 헌정 사상 첫 여성 총리라는 상징성이 있었다. 정치적 위상을 높여 대선 주자 대열에 세우려는 노 대통령의 뜻도 있었다. 그런데 일부에선 신중론이 나왔다. 큰 부처를 맡아본 경험이 없어 행정 능력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내부적으로 대안을 모색했다. 한 총리의 행정 능력을 보완할 유능한 참모를 총리실 국무조정실장에 보내기로 의견을 모았다. 노 대통령의 머릿속엔 내가 떠올랐던 것 같다. 그 자리에 기획예산처 장관인 나를 검토해 보라고 했다. 청와대 인사라인에선 반대 의견을 냈다. “국무조정실장은 장관급이긴 하지만 현직 장관을 보내면 좌천으로 오해를 살 소지가 있습니다. 좌천이 아니라는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총리의 행정 능력에 논란이 불거질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김영주 청와대 경제수석(차관급)이 그 자리로 갔다. 김 수석은 재정경제부 차관보 등을 지낸 행정가였다. 나중에 산업자원부 장관도 역임했다.

2006년 7월 4일 나는 청와대 정책실장 임명장을 받았다. 그해 5월 말에 지방선거가 있었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광역 단체장 16곳 가운데 단 한 곳(전북)을 제외하고 모두 패배했다. 그해 7월 말에는 국회의원 재·보궐선거가 치러졌다. 서울 두 곳을 포함한 전국 네 곳이었다. 여당은 단 한 곳도 이기지 못했다.

정동영, 재보선 권유 뿌리치고 외국행

그 무렵 노 대통령과 단둘이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노 대통령은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에 대해 깊은 아쉬움을 표현했다. 당시 노 대통령은 직접 정 전 장관에게 재보선 출마를 권했다. 지역구는 서울 성북을이었다. 하지만 정 전 장관은 선거 직전 독일로 단기 유학을 떠났다. 출마를 에둘러 거절한 것이다. “당선되든 떨어지든 당을 위해 희생할 용기가 없으면 대선을 이길 수 없습니다.” 노 대통령의 냉정한 평가였다.

이듬해 야당인 한나라당에서 차기 대선 후보 경선이 있었다. 이명박 후보와 박근혜 후보의 경쟁이 치열했다. 노 대통령은 둘 중에선 이명박 후보가 이기길 바랐다. “이명박은 기업인 출신이라서 융통성이 있습니다. 박근혜는 융통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야당 내부에선 박근혜 후보가 유리할 것으로 봤다. 결국 박근혜 후보는 당내 선거인단 투표에선 이겼지만 여론조사에 밀려 이명박 후보에게 최종 승리를 내줬다.

“당신은 이제 다른 사람 못 모신다”

드문 일이지만 노 대통령이 불같이 화를 냈던 기억도 있다. 청와대에서 나를 포함한 몇 명이 노 대통령과 편하게 대화를 나눌 때였다. 한 사람이 말을 꺼냈다. “외부에서 공격받는 부분 중에 대통령 말투가 천박하다는 게 있습니다. 대통령 품위를 생각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노 대통령이 격분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말투를 바꾸라는 건 인생을 통째로 바꾸라는 얘기입니다. 다시 한번 그런 말을 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나는 이런 모습을 솔직담백함으로 받아들였다. 한번은 부부 동반으로 골프를 같이 친 적이 있다. 해외 순방에서 돌아온 직후 시차 적응도 할 겸 운동이나 하자고 했다. 노 대통령이 나에게 극존칭을 쓰는 걸 아내가 직접 봤다. 골프 카트를 탈 때도 꼭 한쪽으로 비켜 앉으며 내 자리를 만들어줬다. 아내가 준비한 팔 토시를 전달했더니 “그것 참 좋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운동이 끝나고 집으로 가면서 아내가 말했다. “당신이 대통령을 모시는지, 대통령이 당신을 모시는지 모를 정도네요. 당신은 이제 다른 어떤 사람도 대통령으로 모시지 못하겠어요.”

그 무렵 이상한 루머도 돌았다. 권양숙 여사가 재벌 부인들과 내기 골프를 치며 돈 따먹기를 즐긴다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실제로 본 권 여사의 골프 실력은 100타도 깨지 못하는 초보 수준이었다. 노 대통령 재임 중에 골프를 쳐본 건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고 했다.

정리·대담=주정완 논설위원, 이정재 전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