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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년 전 천황제 파시즘, 한·일 파트너십에 아직도 걸림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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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0호 26면

이태진의 근현대사 특강 〈2〉

요시다 쇼인의 초상화. [사진 이태진]

요시다 쇼인의 초상화. [사진 이태진]

임진왜란 때 뒷정리가 되지 않아 300년 뒤 청일전쟁이 일어났다는 말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침략전쟁에 대한 조선·명의 응징이 없었던 것이 재침을 가져왔다는 뜻이다.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1905년 ‘보호조약’을 강제하고 돌아가던 그는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자마자 조선 침략의 절대성을 가르쳐준 스승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의 묘소에 측근을 보내 보고를 올렸다.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内正毅, 1852~1919). 그는 1910년 8월 29일 ‘한국병합’ 공포 뒤, 통감 관저에서 부하들과 축배를 올리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여, 당신이 못 이룬 것을 우리가 이뤘습니다”라고 외쳤다. 응징과 심판이 없는 역사의 무서움을 느끼게 한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1954~ 2022). 지난해 총탄에 쓰러진 그는 총리(2차 집권)가 되었을 때, 취임 후 맞이하는 첫 패전일(8월 15일)을 앞두고 국내외 언론의 예상과 달리 야스쿠니 신사가 아니라 야마구치현 하기(萩) 시의 한 묘소 앞에서 무릎을 꿇고 분향했다. 100여 년 전 이토 히로부미가 측근을 보낸 바로 그 요시다 쇼인의 묘였다.

요시다 쇼인, 조선 침략의 절대성 역설

요시다 쇼인. 그는 누구인가. 1600년 일본 전국시대를 마감하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받드는 서군을 지휘하는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 1497~1571) 가문과 이에 반대하는 동군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1543~1616)가 벌인 최후의 결전이었다. 동군 승리로 도쿠가와 막부 시대가 열렸다. 패장 모리 가문은 본거지 히로시마에서 서북쪽의 바닷가 작은 고을 하기로 쫓겨나 조슈(長州)라는 번(藩)의 번주로 명맥을 유지했다. 연간 농산물 100만 석을 요리하던 세도가 30만 석으로 대폭 줄었다. 중앙정치 참여 자격도 박탈됐다. 요시다 쇼인은 바로 이 조슈 번의 무사였다. 병학에 밝고 대담했다. 구미 열강의 함선이 동아시아에 도착한 상황. 일본이 식민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천황을 받드는 중앙집권체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막부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는 두 번 투옥 끝에 29세로 생을 마감했다.

요시다 쇼인이 밀항 기도 혐의로 잡힌 초기 시모다(下田) 옥중에서 동행했던 시부키 마츠타로(攝木松太郞)에게 보낸 한시. ‘오랑캐의 정세를 살피지 않고 어떻게 오랑캐를 제어하겠는가. 오랑캐의 정세는 심원해서 매우 알기 어렵다. 항해를 잘못하고 있는 천하의 형세에 남아는 한 몸의 비애를 바치겠다’는 내용이다. [사진 이태진]

요시다 쇼인이 밀항 기도 혐의로 잡힌 초기 시모다(下田) 옥중에서 동행했던 시부키 마츠타로(攝木松太郞)에게 보낸 한시. ‘오랑캐의 정세를 살피지 않고 어떻게 오랑캐를 제어하겠는가. 오랑캐의 정세는 심원해서 매우 알기 어렵다. 항해를 잘못하고 있는 천하의 형세에 남아는 한 몸의 비애를 바치겠다’는 내용이다. [사진 이태진]

첫 투옥은 도쿄만에 정박 중인 미국 페리 제독의 함대를 이용한 밀항 기도가 탄로 났을 때였다. 그 큰 배와 대포 제조 기술을 배우기 위함이었지, 미국을 동경한 것이 아니었다. 고향 하기로 보내져 투옥된 그는 옥중에서 『유수록(幽囚錄)』을 지었다. 일본이 식민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저들의 우수한 기술을 속히 배워, 저들보다 먼저 주변국을 차지해야 한다고 역설한 글이다. 홋카이도를 개척해 캄차카반도로 진출하는 기지로 삼고, 서쪽의 류큐와 타이완을 정복한 다음, 북으로 조선·만주·몽골·중국을 차지한다. 여기서 힘을 한층 키워 태평양으로 진출하여 미국·호주로 간다. 요시다는 이렇게 침략 순서까지 밝혔다. 그 뒤가 놀랍다. 그의 제자들과 숭배자들이 이를 각본으로 삼아 순서대로 실천에 옮겼다. 막부 타도를 외치다가 다시 투옥된 그는 사형을 앞두고 『유혼록(幽魂錄)』이란 글을 지어 ‘나는 죽지 않고 무사시(武藏, 고대 야마토 조정의 중심) 들에 혼으로 남아 천황을 돕겠다’고 했다.

1868년 9월 조슈와 사쓰마(薩摩) 등 제휴 세력이 천황 추대에 성공했다. 일본은 거대한 변혁을 겪었다. 막부 시대의 지방분권을 중앙집권체제로 바꿨다. 서양 문명 배우기 열기가 타올랐다. 처음에는 미국과 프랑스의 자유주의가 유행했다. 그래서 1870년대 각 지역 세력은 자유 민권 운동을 벌이면서 구미의 의회정치를 목표로 삼아 국회 개설 운동을 벌였다. 중앙의 관계(官界)와 군부에 참여하지 못한 지방세력이 국회를 통해 국정에 참여하겠다는 뜻이었다. 조슈 집권세력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요구로 1880년 우선 천황이 10년 뒤 국회 개설을 약속하게 했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는 2년여 유럽, 특히 독일의 법과 제도를 연구해 내각제, 제국 헌법, 국가 신도(神道), 교육칙어 등을 내놓았다. 그것은 집권세력이 국정을 전담하는 천황제 국가주의 체제였다.

1890년 약속대로 국회가 열렸다. 그러나 국회는 3권분립 체계의 한 축이 아니라 천황이 소집하는 집회로서, 연중 한번 모여 예산을 심의하는 것이 전부였다. 제국 헌법은 서양의 기독교가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천황과 그 조상의 신성을 숭배하는 국가 신도를 만들어 모든 종교 위에 올려놓았다. 기독교가 그 아래 들어설 수 없었다. 교육칙어는 천황에 대한 절대 충성으로 제국의 영광을 빛낼 것을 요구했다.

안중근, 천황제 광풍 막으려 이토 처단

야마구치현 하기시의 쇼인 선사. [사진 이태진]

야마구치현 하기시의 쇼인 선사. [사진 이태진]

메이지 정부는 1880년대 체제 정비와 함께 징병제 시행을 통해 군사력을 키웠다. 그리고 요시다 쇼인의 주변국 선점론 실행에 나섰다. 하기와 도쿄에 쇼인 신사를 세워 모든 사람이 그 정신을 따르게 했다. 1894년의 청일전쟁은 곧 선점정책을 한반도와 대륙에서 실현하려는 첫 발걸음이었다. 일본은 랴오둥반도에 대륙 진출의 거점을 확보하면서 이때 이미 조선을 저들의 보호국으로 만들려고 했다. 일본군은 조선 왕궁을 포위, 압박했지만, 다행히 국왕(고종)은 미국의  그로버 클리블랜드(1837~1908) 대통령에게 ‘선의의 중재’를 요청하여 보호국으로 전락할 화를 면했다.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이토 히로부미 내각에 친서를 보내 계획이 철회됐다. 일본은 최대의 전리품 랴오둥반도마저 ‘삼국간섭’으로 포기해야 했다. 일본은 아직 구미 열강의 불평등 조약에 묶여 운신이 자유롭지 못했던 때였다. 이후 10년간 100만 대군을 양성하면서 ‘조약 개정’을 성사시키고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켜 소기의 목표를 달성했다.

일본의 주변국 선점정책은 이후 주춤했다. 1910년대 세계 평화운동이 1919년 국제연맹의 탄생을 가져오면서 국제 협력 기류가 강해지면서다. 그러다가 쇼와 천황 시대에 선점정책은 다시 발동했다.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1941년 태평양전쟁. 일본은 패전국이 됐다. 만주사변 이후 천황제 파시즘의 물결 속 요시다 쇼인의 전기 수십 종이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요시다 쇼인 정신 따르기로 소년 가미카제가 등장하기도 했다.

일본제국의 대외 팽창 과정은 제국주의 일반론으로 간주하기에는 특이점이 너무 많다. 제국주의 현상으로 돌리는 것은 오히려 면죄부를 주는 행위라는 비판도 있다. 주변국 선점정책 수립 당시 일본은 결코 구미 열강의 제국주의 대열에 속하지 않았다. 천황의 영광을 위한 주변국 침략 목표 달성을 위해 자본주의 경제를 배우기 시작한 때였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획 침략주의로서 제국주의와는 본질이 달랐고, 천황의 영광이란 구호로 수많은 국가 범죄가 저질러질 소지가 많았다. 안중근(1879~1910)은 그 초입에서 앞으로 일어날 수많은 전쟁 범죄를 예견했다. 그는 이를 막기 위해 천주에게 맹세하면서 이토 히로부미 처단에 나섰다. 안중근의 명철은 우리가 영원히 간직해야 할 교훈이다.

패전일(8월 15일)을 이틀 앞둔 2013년 8월 13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고향 야마구치현으로 내려가 일본 우익의 정신적 영웅 요시다 쇼인 묘소를 참배하는 모습. [지지통신]

패전일(8월 15일)을 이틀 앞둔 2013년 8월 13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고향 야마구치현으로 내려가 일본 우익의 정신적 영웅 요시다 쇼인 묘소를 참배하는 모습. [지지통신]

일본을 외교 파트너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대세로 보인다. 그러나 양국의 유대는 과거 역사의 진실에 대한 공동 확인에서 출발해야 한다. 1965년 한일협정은 1910년 병합 무효의 시점에 대한 해석 차이를 양국의 다툼으로 남겼다. 1990년대 초반부터 ‘한국병합’ 강제 관련 조약에 관한 구체적 연구 성과가 나왔다. 1965년에 남겨진 숙제를 푸는 수준의 성과였다. 이를 토대로 2010년 “‘한국병합’ ‘100년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한·일·중·영 4개 국어)이 나왔다. 한국 측의 원천 무효 주장에 일본 정부도 동의해야 한다고 명시한 문장이 들어간 성명서에 무려 540명의 일본 지식인이 서명했다. 이를 배경으로 간 나오토(菅直人) 수상은 “정치적, 군사적 배경 아래” 일본제국이 한국의 국권을 빼앗은 것과 “식민지 지배가 준 다대한 손해와 고통”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사과의 뜻을 표명하였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성명보다 훨씬 진전된 사죄였다. 이 성과를 한국 정부마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2010년 당시 일본 측 지식인 대표였던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는 지난해 제주도 평화회의에서 “조약에 의한 ‘병합’이라는 기만”이란 논문을 발표했다. ‘병합 강제를 위해 동원된 일본의 각종 기만적 외교 방식이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일본 정부가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과거 한일 관련 조약의 잘못에 대한 바른 이해 위에 한일 관계의 신시대를 시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일 정부의 새로운 파트너십 외교는 12년 전 각고의 노력으로 빚어낸 양국 지식인의 성과를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징용 피해자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taejinyi4343@gmail.com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재직중 일제 침략사를 연구했다. 규장각 장서 속 고종·순종의 조칙·칙령 묶음에서 일제가 위조한 황제 서명을 발견했다. 진단학회 회장, 역사학회 회장, 학술단체연합회 회장, 국사편찬위원장 등을 역임했고, 2006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저서로 『고종시대의 재조명』  『일본제국의 ‘동양사’ 개발과 천황제 파시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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