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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경제 10위·민주화·산업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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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8호 27면

 이태진의 근현대사 특강  〈1〉

제헌국회에서 연설 하는 이승만 대통령. 제헌 국회가 1949년 6월 제정한 농지개혁법은 자유민주주의 구축, 자영농 탄생과 산업화로 이어졌다.

제헌국회에서 연설 하는 이승만 대통령. 제헌 국회가 1949년 6월 제정한 농지개혁법은 자유민주주의 구축, 자영농 탄생과 산업화로 이어졌다.

1987년 민주화 선언, 그 후 2019년 대한민국은 세계 경제 10위에 진입했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듯 경제강국 진입도 우리가 각고로 노력해 빚어낸 결실이다. 민족사의 금자탑이라고 자랑할 만하다. 식민통치를 경험한 나라가 경제 10위권에 진입한 예가 없다니 더욱 그렇다. 과연 그 씨앗은 언제 뿌려졌을까.

고종은 청일전쟁이 막판으로 치닫던 1895년 2월 23일(양력) ‘교육 조칙(이하 조칙)’을 반포한다. 교육을 통해 ‘나라의 원한에 대적할 사람’ ‘나라의 모욕을 막을 사람’ ‘나라의 정치제도를 닦아나갈 사람’인 ‘국민’을 창출할 의지를 밝힌다. 국한문 혼용체였다. 이후 4개월간, 6월까지 내린  개혁 관련 교서들은 모두 국한문 혼용체였다. 왜 그랬을까. 서민 대중이 읽을 수 있도록 한문 형식을 버렸다. 1896년 4월 창간한 한글 전용 ‘독립신문’도 같은 이유다. 군주, 즉 고종이 국민 창출을 목표로 관·민 협동 단체로 독립협회를 세우고 그 기관지로 이 신문을 발행하게 했다. 독립신문은 서재필 개인의 신문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고종 “대한은 여러분의 것” 주권 이양

덕·체·지. ‘조칙’은 3양(三養)을 신교육의 강령으로 내세웠다. 17세기 영국의 존 로크가 제창한 교육론이 이 땅의 교육 강령으로 채택된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고종은 1886년 근대식 왕립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을 만들었다. 3양 교육은 18세기부터 미국 중등교육의 방침이었다. 이 3양 교육을 받은 미국인 교수들이 육영공원에 들어왔다. ‘조칙’은 육영공원의 미국인 교수들, 특히 한글을 높게 평가했던 호머 헐버트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헐버트는 제자 주시경을 독립신문 편집에 참여시키기도 했다.

고종은 신식 교육 조치를 일사천리로 단행했다. ‘조칙’이 반포된 1895년에 한성사범학교, 소학교, 각국 외국어학교 설립이 잇따랐다. 독립신문은 신지식의 샘이었다. 당시 독립신문 광고로 자주 등장한 책자가 있다. 헐버트가 쓴 『사민필지(士民必知, 1889)』다. 조선의 선비와 평민이 모두 알아야 할 서양에 관한 지식을 담았다. 신지식을 통해 서민 대중이 국민의 도리를 일깨우도록, 독립신문은 초기 매호에 이 책을 광고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1907년 2월. 일제의 경제 침탈 속에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신문들은 국권 회복을 위한 이 운동을 지원했다. 그리고 ‘국민’과 ‘의무’라는 표현을 썼다. 나라가 부당하게 진 빚을 갚는 것은 ‘국민의 의무’라고 외쳤다. 운동 본부의 이름 또한 의무사(義務社)였다. ‘의무를 앞세운 국민’의 탄생, 이런 역사는 세계에서 예를 찾기 힘들다.

고종 황제의 1904년 모습. 고종은 1895년 ‘교육 조칙’ 등 신교육 조치를 잇달아 내면서 ‘국민’의 탄생을 유도했다. [중앙포토]

고종 황제의 1904년 모습. 고종은 1895년 ‘교육 조칙’ 등 신교육 조치를 잇달아 내면서 ‘국민’의 탄생을 유도했다. [중앙포토]

대한제국이 경제 분야에서 이룬 업적으로 광무 연간의 양전(토지측량)과 지계(토지문서) 발급 연계사업의 성과를 드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연구자는 없다. 농정 근대화의 기초가 된 것이 틀림없다. 주목할 것은 이 사업이 ‘조칙’이 반포된 1895년 바로 그해에 검토됐다는 점이다. 이기(李沂, 1848~1909)의 건의를 곧바로 수용했지만, 실행은 외세의 개입으로 3년 이상 늦어졌다.

1895년 후반 일제는 조선의 자주 개혁에 반발했다. 왕비를 시해해 일본군이 대거 서울로 진입하는 빌미를 만들어 친일 내각을 내세웠다. 군주를 경복궁에 가두다시피 했다. 4개월 뒤에서야 왕은 궁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에 들어갔다. 여기서 개혁정치를 복원하고 1897년 10월에 대한제국을 출범시켰다. 앞서 제안된 양전 사업은 1898년 6월 양지아문 설립으로 본격화되었다. 1906년 통감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전국 농지 3분의 2를 정비하는 성과를 거뒀다. 2년 뒤에는 지권을 발급해 소유권(또는 경작권)을 보장했다. 이런 근대적 농정 기반은 생산력과 세수 증대를 불렀다. 한 연구는 대한제국의 예산이 1897년 400여만 원에서 1905년  2000만 원에 육박할 정도로 급증한 것을 밝혔다. 당시 높았던 농업 비중을 고려하면, 지세 수입이 늘면서 예산 증가로 이어졌음을  확신할 수 있다. 1905년 ‘보호조약’ 이후 일본의 국권 침탈이 없었다면 대한제국의 경제는 번성 일로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1907년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서 싸우다가 황제 자리에서 밀려난 고종은 1909년 3월 15일에 태황제로서 의미심장한 칙유를 내린다. “대한은 나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것”이라고 주권 이양을 선언했다. 그리고 “민은 자유라야 하며 나라는 독립국이어야”라고 천명하면서 “여러분이 교육을 통해 자유민으로 힘을 키워 훗날 광복에 성공해 달라”고 당부했다.

일제 국권 침탈로 자주적 번성의 길 막혀

1957년 농가를 찾은 이승만 대통령.

1957년 농가를 찾은 이승만 대통령.

고종이 승하한 1919년. 3·1 독립 만세운동의 힘으로 4월 상해 임시정부가 섰다. 이때 대한제국을 승계하는 ‘민국’으로서 대한민국이란 국호가 탄생했다. 임시헌법은 민주 공화제를 표방하고 대한제국 영토 승계와 구 황실의 우대를 명문화했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가 된 본토의 국민은 피폐해져 갔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일제 치하의 한국인을 “노예와 같은 상태”라고 표현했다. 그는 한국의 농지개혁안을 준비했다. 전쟁 뒤 해방된 한국의 농민들을 자영농으로 자립시키며 사회주의 국가로 전락하는 것을 막고자 했다. 그는 그 결과를 보지 못하고 1945년 4월에 사망했지만, 미 국무부가 준비한 농지개혁안은 미 군정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1948년 8월 15일에 새로 출범한 이승만 정부에 다시 넘어갔다.

지난해 8월 ‘대한독립에 헌신한 외국인’을 주제로 발행한 호머 헐버트 우표. 헐버트는 덕·체·지 ‘3양’을 내세운 대한제국 신교육 강령에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연합뉴스]

지난해 8월 ‘대한독립에 헌신한 외국인’을 주제로 발행한 호머 헐버트 우표. 헐버트는 덕·체·지 ‘3양’을 내세운 대한제국 신교육 강령에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연합뉴스]

대한민국 정부는 제헌국회 심의를 거친 농지개혁법을 1950년 4월 3일에 공표했다. 경작 농민이 10년간 소출의 30%를 국가에 조세로 내면 소유권을 가진다는 내용이었다. 북한도 38선 이북 점령 지역에서 토지개혁을 시행했다. 경작 농민은 소출의 40%를 국가에 내는 조건이었고 개인 소유권은 보장되지 않았다. 남쪽 농민 다수는 북쪽의 토지개혁에 현혹되지 않았다. 한국전쟁으로 남쪽의 농지개혁법은 주춤했다. 미국 정부는 즉각 시행을 강권해 1952년 전시 중에 농지개혁법 시행은 끝을 봤다. 이것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기초가 된 것임은 말할 나위 없다. 반세기 전 대한제국 정부가 기도했던 자영농 사회 확립이 드디어 현실이 됐다.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출범한 박정희 정권의 공업화 정책은 대한민국 경제의 새로운 단계로의 진입이었다. 17년간의 장기 집권체제 아래 4차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추진, 그 후 신군부의 두 차례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이 이어졌다. 1987년 민주화 선언을 거쳐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의 발돋움했다.

1895년 2월 2일(음력) 자 관보에 실린 ‘교육 조칙.’ [사진 이태진]

1895년 2월 2일(음력) 자 관보에 실린 ‘교육 조칙.’ [사진 이태진]

산업화의 성공은 자영농 창출의 농업경제가 선행하지 않고서는 이루기 어려운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1950년대 농지개혁의 성공이 없었다면 1960년대 이후 산업화 정책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경지 정리를 통한 벼농사 장려와 도시로 빠져나가는 농업 노동력의 손실에 대비해 반 기계영농을 추진한 것은 기획성이 돋보였다.

광무 7년(1903) 8월 1일 발행한 지계. [사진 이태진]

광무 7년(1903) 8월 1일 발행한 지계. [사진 이태진]

학계 일각에서 대한제국의 국제(國制)가 황제 전제정치를 표방했다고 해서 근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견해가 있다. 이는 대한제국에 대한 평가를 소극적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최근 일본의 한 헌법학자는 “어디까지나 국제사회를 향한 주권 국가의 표방으로서 그랬지, 입헌군주제의 근대성과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그 때 표방된 교육을 통한 자유 국민 창출 노선이 항일 독립운동뿐 아니라 경제개발 정책 속에 빚어진, 독재에 맞서는 또 다른 힘의 원천으로 작동한 점을 상기하면, 조선·대한제국의 근대화 정책에 대한 평가는 만시지탄의 감이 없지 않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taejinyi4343@gmail.com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재직중 규장각도서관리실장을 맡으며 일제 침략사를 연구했다. 규장각 장서 속 고종·순종의 조칙·칙령 묶음에서 일제가 위조한 황제 서명을 발견했다. 진단학회 회장, 역사학회 회장, 학술단체연합회 회장, 국사편찬위원장 등을 역임했고, 2006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저서로 『고종시대의 재조명』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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