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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뒤흔드는 ‘재난 리스크’] EU, 튀르키예 지진 3시간 만에 우주서 수집한 자료 제공…초대형 재난 대응에 손잡는 지구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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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0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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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지진

튀르키예 지진

11일로 12주년을 맞은 동일본 대지진과 지난 6일로 발생 한 달이 지난 튀르키예·시리아 강진은 초대형 재난이 인류의 생명과 안전을 얼마나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는지를 생생히 보여줬다. 특히 예고 없이 닥치는 지진과 해일, 화산 폭발 등 자연재해와 홍수·가뭄·폭염·산불 등 기후변화에 따른 기상이변이 갈수록 빈번해지면서 국제사회도 지구촌의 새로운 위협 요소로 떠오른 ‘재난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한 전략적·집단적 대응 방안을 강구하고 나섰다.

주목할 부분은 각국 정부나 개별 국제기구 단위의 기존 대처 방식으로는 최근 급증하는 자연재해와 기상이변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가 점점 힘들어지면서 국제사회도 새로운 대응 전략을 모색하게 됐다는 점이다. 21세기 들어 재난 피해 규모와 범위가 전례 없이 커지면서 세계보건기구(WHO)나 유엔난민기구(UNHCR)·유니세프(UNICEF)·유엔세계식량계획(WFP)·국제이주기구(IOM) 등 개별 기구 활동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하다는 판단에서다. 이에 따라 국제사회는 각국 정부와 유엔·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등의 유기적 결합을 통해 피해는 최소화하고 지원 효과는 극대화하는 방안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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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전쟁 못지않게 평화·안정 위협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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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창설된 집단 안보기구인 나토가 지난달 튀르키예·시리아 강진 발생 직후 보인 신속하고도 적극적인 움직임이 대표적이다. 나토는 지진이 발생하자마자 다국적 전략항공수송대(SAC)를 긴급 출동시키며 구급·구조 인력과 구호물자 수송 작전에 나섰다. 2008년 창설된 SAC는 그동안 장거리 대형 전략수송기인 C-17 글로브마스터Ⅲ 3대를 헝가리 파파 비행장에 상시 배치해 놓고 긴급 상황에 대비해 왔다. 2010년 아이티 강진과 파키스탄 대홍수, 2017년 카리브해 지역 허리케인 피해 때도 긴급 수송 작전에 나서며 큰 활약을 펼쳤다. 리비아·아프가니스탄과 중앙아프리카 등에서는 군사 수송 작전과 인도적 지원을 함께 펼치기도 했다.

눈에 띄는 점은 나토가 이전 자연재해 때처럼 SAC를 단독으로 가동하지 않고 유엔은 물론 유럽연합(EU) 회원국들과 긴밀히 공조하며 구호 작전을 진행했다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 나토는 지난달 17~19일 독일에서 열린 뮌헨안보회의(MSC)에서 군사 지도자와 안보 전문가들의 글로벌 네트워크인 ‘기후와 안보 국제군사위원회((IMCCS)’와 공동으로 긴급 원탁회의를 열고 보다 효과적인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이는 유럽 각국이 대규모 홍수·지진·산불 등 자연재해와 기상이변에 따른 ‘재난 리스크’가 국제적 분쟁 못지않게 지구촌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안보 리스크’로 급부상하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민관을 아우르는 집단적 대응을 통해 위기관리에 본격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나토의 신속 대응 체제를 적극 활용하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나토의 신규 안보 도전 담당인 다비드 판벨도 원탁회의에서 “적극적인 기후변화 대응 활동은 집단 안보와 작전의 효율화, 신뢰할 수 있는 억제라는 나토의 군사적 목표 달성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재난 대비에 더욱 역점을 둘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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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차원의 적극적인 대응도 주목된다. EU는 지진 발생 직후 튀르키예 정부의 요청에 따라 위기관리 담당 집행위원이 관장하는 시민보호·인도주의구호국(ECHO) 주도로 ‘시민보호 매커니즘(CPM)’을 가동했다. 이에 맞춰 23개 회원국은 31개 구조팀과 5개 의료팀을 현지에 급파했다. 또 긴급 구호자금 650만 유로를 지원한 데 이어 오는 16일 원조 공여국 회의를 열고 추가 지원 계획을 확정할 예정이다. ECHO는 이번 대지진을 계기로 유엔과 비정부기구(NGO) 등 전 세계 200여 개 파트너와 인도적 지원을 위한 협력 네트워크를 한층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EU는 하이테크를 활용한 지원에도 앞장서고 있다. 실제로 지진이 발생한 지 불과 세 시간 만에 지구 관측용 우주 프로그램인 ‘코페르니쿠스 비상관리시스템(CEMS)’을 가동해 우주에서 수집한 재난 지도 데이터를 튀르키예 정부와 국제구호기관에 제공했다. 이 데이터는 지진 피해 지역 건물·도로의 파괴 상황을 소상하게 제공해 구조·구호 작업에 적잖은 기여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제사회도 하이테크에 기반한 국제 재난 협력 시스템의 모범 사례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다.

그런 가운데 일부 중견국들은 긴급 구조·구호 등을 통해 국가 브랜드 가치와 외교력 증대를 꾀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번 대지진에 국가재난대응부대(NDRF)를 긴급 파견한 인도와 민·군이 동시에 지원팀을 보낸 이스라엘이 대표적이다. 인도는 2015년 네팔 대지진 때 NDRF를 동원해 ‘마이트리(우호) 작전’으로 명명된 지원에 나섰다. 이번 튀르키예·시리아 지원에는 ‘도스트(친구) 작전’이란 명칭을 붙였다. 여기에 야전병원까지 현지에 마련하며 ‘준비된 재해 지원국’ 이미지를 전 세계에 각인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스라엘은 정부와 군 차원에서 긴급 구호·구조팀을 보낸 데 더해 민간단체들도 별도의 긴급 구호팀을 파견한 점이 돋보인다. 글로벌 위기 대응을 정부의 전유물로만 인식하지 않고 민간도 함께 발을 맞추고 나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는 평가다. 이는 향후 국제사회에서의 발언권을 강화하려면 경제·군사·문화 국력을 넘어 민·관을 포괄하는 인도주의적 기여가 필수임을 보여주는 사례로 ‘글로벌 중추국가(Global Pivotal State·GPS)를 지향하는 한국 정부가 참고할 만한 대목이다.

글로벌 재난 대응 동참, 선택 아닌 필수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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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적대적 갈등 관계에 있던 국가들이 적극적인 구호·구조 지원을 관계 개선의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나토 가입 문제 등을 둘러싸고 튀르키예와 갈등을 빚었던 스웨덴과 핀란드·그리스 등이 대지진 직후 인도주의적 지원에 적극 앞장선 게 대표적이다. 국제사회는 이 같은 신속한 대처가 향후 관계 정상화로 이어질 수 있을지 주시하고 있다.

미국의 움직임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국제개발처(USAID)를 통해 튀르키예 지원에 나서는 것과는 별개로 이번 지진을 계기로 우방국들을 모아 동아시아와 중동 지역에서 나토의 SAC와 유사한 ’다국적 전략 항공·해상 수송대‘를 조직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다.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미 국무부와 국방부는 이미 우방국들을 대상으로 참여 의사를 타진하기 시작했다.

유사시 피해 주민에게 식수·식량·의약품·의류·침구에 더해 임시 주거용 텐트와 간이 화장실, 컨테이너 가설 주택 등을 신속하게 다량으로 제공하는 것은 인도주의 작전의 기본이다. 모듈식 수술실과 검사 시설 등을 갖춘 긴급 야전병원도 운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제대로 된 공중·해상 수송 능력을 갖춘 국가의 참여가 필수다. 미국이 앞장서서 우방국들의 동참을 유도하는 것도 급증하는 자연재해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보다 신속하고 체계적인 글로벌 지원 체계를 갖춰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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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 이번 지진 직후 공군의 다목적 공중급유기 KC-330에 118명의 해외긴급구호대(KDRT)와 의약품 등 구호물품을 싣고 튀르키예로 향하며 글로벌 작전 능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한국은 구급·구호 물자를 다량 적재하고 재해·재난 지역까지 긴급 수송할 수 있는 대형 함정도 보유하고 있다. 헬기 등을 적재한 1만9000t급 강습상륙함인 독도함과 마라도함이 대표적이다. 1만9000t급 강습상륙함 두 척과 2만4000t급 헬기 모함 두 척을 운용 중인 일본도 국제 구호·구조 작업에 적극 나설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에 미국은 다국적 전략 항공·해상 수송대에 한·일 양국의 참여를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우리 정부도 이 같은 국제사회 흐름을 정확히 인지하고 인도적 지원을 위한 글로벌 네트워크에 어떤 방식으로 동참할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와 동시에 튀르키예 긴급구호대 파견을 계기로 ‘글로벌 재난 상시 대응 기구’를 범정부 차원에서 갖추면 시너지 효과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한국과의 과거 인연을 강조하거나 교민 안전만 챙기는 기존의 소극적 대응 수준을 넘어 글로벌 중추국가로서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역통상국가인 한국 입장에서 글로벌 재난 대응에 적극 동참하는 건 이젠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tzschaei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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