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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6년 만에 ‘주적’ 넣은 국방백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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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허재영 연세대 글로벌인재학부 교수

허재영 연세대 글로벌인재학부 교수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집권한 정부마다 경제·사회 정책은 물론이고 외교 정책도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외교 정책의 가장 큰 목표인 안보와 국방만큼은 변함이 있을 수 없다. 오랜 역사를 통해 증명돼 온 것처럼 국가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는 명확하다. 국익을 침해할 수 있는 위협 요소를 찾고, 대비할 수 있는 능력과 태세를 갖추는 것이다.

최근 공개된 윤석열 정부의 첫 ‘국방백서’는 대한민국에 무엇이 위협이며, 또 이에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 가를 담고 있다. 정치 집단의 대외정책 방향은 의도와 능력으로 구분될 수 있다. 우리에게 적대적인 의도를 갖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위협적인 능력을 구비하고 있는 집단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적’이다. 2022 국방백서는 이런 관점에 따라 ‘누가 우리의 적인가’를 논리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주적 개념을 분명히 한 국방백서는 6년 만이다.

윤석열 정부의 안보 정책 제시
“북한 정권은 적” 명확한 선언
인도·태평양 협력 강화 주목돼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우리에게 북한은 교류 협력을 통해 통일을 지향하는 상대이기도 하지만, 현존하는 최대 안보위협이기도 하다. 북한 정권은 한국을 적으로 규정했으며 한반도 전역의 공산화라는 적대적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더욱이 북한은 지난해 9월 핵의 선제 사용을 배제하지 않는 ‘핵 무력 정책’을 법제화했다. 북한군은 정권의 적대적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 핵·미사일을 포함해 공세적인 군사력을 지속해서 증강하고 있다.

북한은 지난 8일 북한군 창건 75주년 열병식에서 전술핵 운용부대를 공개해 위협의 수준을 한층 더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렇게 북한의 도발적 대남전략, 핵전력 증강, 군사적 위협 정도가 날로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 정권과 북한군을 적이라고 지칭하지 못하는 군이 있다면 과연 국민이 그런 군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핵과 대량살상무기(WMD)가 북한의 군사적 위협 중 가장 심각한 문제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2022 국방백서는 북한의 핵·WMD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노력과 앞으로 추진 방향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이번 백서는 우리의 공세적 개념을 북한의 미사일 발사 징후가 명백할 경우 사전에 제거하는 킬 체인(Kill Chain), 다양한 미사일을 조기에 탐지 및 요격하는 한국형 미사일 방어(KAMD), 핵·WMD 실제 사용 시 압도적 타격으로 응징 보복하는 대량응징보복(KMPR)으로 세분해 설명하고 있다. 공격-방어-응징으로 구성된 한국형 3축 체계가 완전성 있게 제시된 것이다.

적이 공격하면 막아내고 오히려 더 큰 손해를 입혀 응징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상대에게 신뢰성 있게 전달함으로써 도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억제의 작동 원리다. 그런데 내가 응징 보복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다는 메시지를 상대에게 숨기는 것은 억제의 기본을 망각한 것이다. 억제는 상대의 선의나 양심이 아니라 나의 힘으로 구현되기 때문이다. 즉, 한국형 3축 체계는 이러한 억제의 작동원리가 잘 녹아들어 있다.

2022 국방백서에서 눈에 띄는 또 하나의 변화는 인도·태평양 지역이라는 지정학적 개념을 공식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동북아 지역에만 국한하지 않고 지난 몇 년 사이 세계 주요 국가들이 인도·태평양 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인도·태평양 지역에 대한 전략을 재정비하고 있는 국제 정세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 정부도 ‘자유·평화·번영의 인도·태평양 전략’을 발표하며 전환의 시작을 알렸다. 마침내 국방의 관점에서도 인도·태평양을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 평가할 수 있다.

한·일 안보협력 증진 의지도 눈여겨볼 만하다. 미국과 군사동맹을 공유하고 북한의 핵·WMD 위협에 나란히 노출된 일본과의 안보 협력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국방백서에서 기술한 것처럼 역사 인식과 독도 등 현안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대처하고 단호한 원칙을 유지하되 국방 분야에서는 미래지향적 협력을 심화해 나가야 할 것이다.

국방부는 2022 국방백서를 발간하면서 힘에 의한 평화 기조에 입각한 국방백서의 귀환을 알렸다. 2년 뒤 발간할 ‘2024 국방백서’에서는 각 분야에서 한층 진일보한 성과와 더 진취적이면서도 전략적인 방향성이 담기기를 기대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허재영 연세대 글로벌인재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