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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인터넷 경쟁력 추락 심상찮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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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범준 계명대 전자공학과 교수

김범준 계명대 전자공학과 교수

꽤 오래전 일이다. 외국에서 온 손님이 인터넷에서 무언가 다운로드를 하다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파일 전송속도가 매우 빨라서 그랬기 때문이라 짐작하면서 속으로 꽤 흐뭇했던 기억이 난다. 요즘도 대한민국의 인터넷 속도가 세계 1, 2위를 다투고 있으리라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상당히 다르다. 심지어 최근 해외의 한 민간 조사기관은 한국의 초고속 인터넷 평균 전송속도가 세계 34위에 그쳤다는 측정 결과를 발표했다. 물론 인터넷 전송속도는 측정 구간과 시간대, 측정 단말의 종류 및 성능 등 다양한 요소에 의해 영향을 받기에 이번 조사 결과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보다 인터넷 속도가 빠른 국가가 많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국 인터넷 속도, 34위까지 하락
통신속도 개선하려는 투자 부족
콘텐트 사업자도 책임 분담해야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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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인터넷이 한창 구축되던 초기는 국내 통신 사업자에게 상당히 유리한 환경이었다. 국가 면적이 좁은 데다 인구가 밀집해 있으니 망을 구축하는데 들어가는 어려움이 적었다. 통신사업자들은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망을 구축하고 많은 가입자를 유치해 수익을 확보하는 것이 가능했다. 게다가 당시 서비스는 텍스트 위주의 이메일·웹이 주류였기 때문에 전송할 데이터양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새로운 형태의 서비스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환경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미지 위주의 서비스를 거쳐 최근에는 대부분의 인터넷 트래픽을 영화 등 동영상(비디오) 서비스가 차지하고 있다. 동영상 서비스가 급증하면서 인터넷 트래픽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한 동영상 서비스 제공을 더 촉진한 것은 OTT(Over-the-Top) 서비스의 등장이다. 흔히 알려진 유튜브·넷플릭스뿐만 아니라 방대한 미디어 콘텐트를 보유한 디즈니+ 같은 전통적 기업들도 OTT 서비스에 나서고 있다.

이들 OTT 서비스의 전달 구조는 사용자가 원하는 시간에 서버에 접속해 1대 1로 연결되는 구조다. 이 때문에 정해진 시간에 일정표에 따라 하나의 콘텐트를 방송하던 공중파 TV 서비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트래픽을 만들어낸다. 조만간 동영상을 뛰어넘는 AR·VR·메타버스·홀로그램 등 신기술에 의해 탄생하는 새로운 콘텐트가 보편화한다면 이런 상황은 더 심화할 것이 분명하다.

지난 20여년간 한국의 인터넷 환경은 줄곧 개선돼 왔다. 더 빠른 전송속도를 제공해 더 많은 가입자를 유치하기 위한 통신사업자들이 경쟁한 결과다. 정부 당국도 인터넷이 국가 경쟁력과 국민 삶의 질에 주는 영향을 고려해 통신 서비스 품질 측정 결과를 매년 발표하면서 선의의 경쟁을 촉진했다. 그 과정에서 통신사업자들은 회선을 확장하고 더 좋은 성능과 기능을 갖춘 새 장비를 도입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하지만 최근 이러한 노력이 지속할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긴다. 늘어나는 차량의 원활한 통행을 위해 도로를 무한정 넓히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다행히 통신망은 상당한 재정적 투자가 이뤄지면 확장 가능성은 있다. 도로는 국가가 관리하기 때문에 국가 예산을 통해서 건설·확장·유지·보수가 가능하겠지만, 이익을 추구하는 민간 통신사에 오로지 사회적 책무만을 내세워 투자를 지속하라고 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 것이다.

한때 통신사업자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표현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기존 통신망을 이용해 OTT 서비스를 제공하는 콘텐트 사업자를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이들은 매달 받는 회비 성격의 수익뿐만 아니라 광고 수익 등을 통해 높은 이익률을 달성하며 가파른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급증하는 차량에 의한 도로 체증이나 과적 차량으로 인한 도로 파손 피해는 누구에게 돌아갈까. 얼마 전에 발생한 통신망 장애로 전 국민적 불편을 경험했다. 통신망이 감당할 수 있는 적절한 수준의 전송 용량과 트래픽 부하 간에 불균형이 심해지면 유사한 장애는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 인터넷은 모두의 소중한 자산이다. 소중한 자산을 잘 지켜나가려면 비용 분담 방안을 놓고  통신사업자와 콘텐트 사업자가 전향적으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범준 계명대 전자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