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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창가와 반일만 부르짖을 수 없다"…尹, 강제징용 결단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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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일 서울 중구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제104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윤 대통령은 이날 일본을 안보와 경제, 글로벌 어젠다의 파트너라고 밝혔다. 사진 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일 서울 중구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제104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윤 대통령은 이날 일본을 안보와 경제, 글로벌 어젠다의 파트너라고 밝혔다. 사진 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이 6일 외교부가 공식 발표한 한·일 강제징용 해법과 관련해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결단”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한덕수 국무총리와의 주례회동에서 “한·일 관계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려면 미래 세대가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양국 정부가 노력해야 한다”라며 이같이 말했다고 이도운 대통령실 대변인이 브리핑에서 전했다. 윤 대통령의 당부에 한 총리는 “문화·외교·안보·경제 글로벌 이슈 등 양국의 분야별 협력 사업을 속도감 있게 추진하겠다”고 답했다.

이와 관련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죽창가와 반일만 부르짖으며 미래 청년 세대를 볼모로 잡아선 안 된다’는 것이 윤 대통령이 협상 과정에서 밝혀온 일관된 입장”이라며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국익과 미래 세대를 위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푼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초 대통령실 내에선 강제징용 협상과 관련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는 신중론이 높았다고 한다. 40% 안팎에 머무는 윤 대통령 지지율 속에서 자칫 '친일 프레임'에 걸렸다가는 국정 운영에 차질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지지율이 떨어지더라도 더는 양국 관계를 방치할 수 없다”며 주저하는 참모진을 직접 설득했다고 한다. 2018년 강제징용 판결과 2019년 일본의 무역 보복 조치 뒤 죽창가를 울리며 양국 관계 회복에 사실상 손을 놓았던 문재인 정부를 답습할 순 없다는 의지가 컸다는 것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지난해 3월 1일 서울 서대문구 국립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에서 열린 제103주년 3.1절 기념식에서 만세삼창을 외친 뒤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지난해 3월 1일 서울 서대문구 국립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에서 열린 제103주년 3.1절 기념식에서 만세삼창을 외친 뒤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실제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부터 양국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았다는 것이 공통된 평가다. 문 전 대통령은 2017년 5월 취임 직후 아베 신조(安倍晋三) 당시 일본 총리와의 통화에서 “우리 국민 대다수가 정서적으로 위안부 합의를 수용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라며 박근혜 정부에서 양국이 합의한 한·일 위안부 합의를 무력화했다. 일본 측에선 “정부가 바뀐다고 과거 합의를 뒤집으려는 건 전례 없는 일”이란 비판이 나왔다. 문 전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와 광복절 경축사 등에서 일본을 가해자로 지목했다.

2018년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 뒤 일본이 반발했을 때도 해결책을 모색하기 보단 ‘반일 감정’을 국내 정치에 활용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2019년 일본의 반도체 수출 규제 조치 뒤 조국 전 법무부 장관(당시 민정수석)이 페이스북에 올린 죽창가가 대표적이다. 문 전 대통령도 일본의 무역 보복에 대해 “우리는 다시는 일본에게 지지 않을 것”이라고 반발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2019년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공식환영식에서 의장국인 아베 신조 당시 읿본 총리와 악수한 뒤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전 대통령이 2019년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공식환영식에서 의장국인 아베 신조 당시 읿본 총리와 악수한 뒤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대북 관계와 관련해선 일본에 저자세를 보이기도 했다. 일본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북한의 참여를 유도하려 멈춰섰던 대일 외교 채널을 가동한 이른바 ‘도쿄 구상’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코로나19와 북한의 불참으로 물거품이 됐다. 그 뒤 문 전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 해 3·1절 기념사에선 “한·일 양국의 협력은 미래세대를 위한 현 세대의 책무”라며 일본에 손을 내밀었다. 한·일 양국 정상은 2019년 한·중·일 정상회의를 계기로 만난 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할 때까지 어떠한 정상회담도 갖지 않았다.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문재인 정부는 대북 관계에 집중하며 한·일 관계가 파탄이 날 때까지 사실상 방치했다”며 “북한의 핵 위협이 고도화되고 공급망이 재편되는 과정에서 한·일 관계의 회복과 한·미·일 협력 강화는 한국의 생존이 걸린 문제가 됐다”고 말했다.

대통령실은 이달 하순 윤 대통령이 일본 도쿄를 방문해 기시다 총리와 한·일 정상회담을 갖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한·일 정상이 양국을 오고 간 게 중단된 지 12년째”라며 “앞으로 이를 심도 있게 논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3일(현지시간) 캄보디아 프놈펜 한 호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악수하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3일(현지시간) 캄보디아 프놈펜 한 호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악수하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6일 발표한 강제징용 해법의 핵심은 2018년 대법원으로부터 배상 확정판결을 받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일본 피고 기업(미쓰비시중공업·일본제철) 대신 한국 정부가 판결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이다. 행정안전부 산하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포스코 등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수혜 기업으로부터 출연금을 모아 피해를 배상하게 된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강제징용 배상 문제가 해소됐다는 일본 정부의 요구를 한국 정부가 수용한 셈이다.

대신 일본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 외무상이 6일 정부 발표 뒤 “일본 정부는 1998년 10월에 발표된 한·일 공동선언(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포함해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계승하고 있음을 확인한다”고 밝혔다. 하야시 외무상이 언급한 김대중·오부치 선언에는 일본의 식민 통치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사죄가 담겨있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도 같은 날 참의원 예산위원회에 출석해 “역사 인식에 관해서는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해 왔고, 앞으로도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이 6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일제강점기 징용 해법 발표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이 6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일제강점기 징용 해법 발표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와 관련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이날 오후 언론 브리핑에서 “일본 정부가 그간 표명해 온 과거에 대한 반성과 사죄의 입장을 재확인하면서 미래 지향적인 양국 관계 발전을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을 평가한다”며 “윤석열 정부는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시장경제 가치를 공유하는 일본과 공동이익을 추구하며 지역과 세계 평화를 위해 함께 노력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협상 결과에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면서도 “중국의 역내 영향력이 확대되고, 북한이 사실상 핵무장 국가에 진입한 상황에서 한·일 협력의 중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커진 상황임을 부인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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