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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훈 칼럼

여당 전당대회, 법치와 인치의 시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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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장훈 중앙대 교수·본사 칼럼니스트

장훈 중앙대 교수·본사 칼럼니스트

#0. 본론에 앞서 독자들과 만나는 이 지면에 대한 필자의 소회부터 나눠보자.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 시간의 약 5분. 독자들께서는 2400자짜리 이 칼럼을 끝까지 읽는 데에 대략 5분 정도의 시간과 집중력을 쓰게 된다.

불과 수십초 짜리 쇼츠가 콘텐트 세계를 지배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디지털 쇼츠 시대에 살아남은 외로운 근대인들이다. 자세를 잡고 앉아 무려 2400자의 문자에 집중하고 그 의미를 파악하는 ‘읽기’ 행위는 오늘날 천연기념물처럼 귀해지고 있다. 200여년을 이어온 이 근대적 행위는 요즘 챗GPT에 대한 환호와 경배, 릴스와 쇼츠의 홍수 속에서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와 독자들은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에도 읽고 쓸 것이다. 짜릿한 것들은 찰나의 매혹이지만 결국 살아남는 것은 긴 호흡의 이성적 행위들이라고 믿기에.

법치주의자 대통령의 난제 여당
인적 지배로도 법치로도 못 풀어
법치, 인치, 정치세계를 구분하는
유연한 ‘수시변역’ 권력이 해결책

#1. 긴 호흡과 장기 맥락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 근대 독서인들이 요즘 생각하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먼 훗날 한국 민주주의의 흥망성쇠를 돌아보게 되는 날 윤석열 정부는 어떻게 기록될까. 윤 대통령 본인의 희망도, 대다수 지지자의 바람도 하나로 모일 것이다. 법치주의 정부. 민주주의를 괴롭히는 아킬레스건인 다수의 변덕스럽고 무지한 횡포에 맞서 법질서를 고수했던 정부. 역대 정부들이 슬그머니 타협하거나 외면해온 조직화한 강자들(강성 노조, 시민단체)의 반칙에 맞섰던 정부. 평생 법조인의 길을 걸어온 윤 대통령으로서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웅장해질 만한 역사책 속 자신의 위상일 것이다.

#2. 법치주의 대통령으로 기억되고픈 윤 대통령의 핵심 프로젝트를 좀 먹는 중대 장애물이 하나 있다. 인치(人治)의 유혹. 민주정치 체제에서 유일하게 전 시민의 참여를 통해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받는 대통령의 숙명 같은 그림자는 제왕적 권력의 유혹이다. 그리고 그 유혹의 지름길은 절차와 투명성을 무시하는 인치(人治)의 유혹이다.

윤 대통령에게 인치의 덫은 멀리 있지 않다. 바로 이번 주 전당대회를 앞둔 여당에 대한 인적 지배의 유혹이다. 확고한 물증은 없다. 하지만 어지간한 정치 관심층들 사이에서 의구심은 널리 퍼져 있다. 당 대표 경선규칙의 돌발 변경, 일부 인사들의 경선 포기 과정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

#3. 여당 전당대회의 결과가 어떤 색깔로 나타나든 간에 대통령-여당 관계는 앞으로도 윤 대통령의 정치 자산과 법치주의 프로젝트에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일견 흡족해 보이는 일사불란한 여당도, 집안싸움에 허우적거리는 여당도 모두 윤 대통령에게는 짐이다. 일사불란해 보이던 여당이 총선 이후 돌연 대통령에게 등을 돌린 배신의 역사는 반복되어 왔다. 또한 자중지란 속의 여당이 대통령에게 큰 부담인 것은 굳이 새삼 강조할 필요조차 없을 터.

#4. 그렇다면 대체 윤 대통령은 대통령-여당 관계를 어떻게 풀어가야 한다는 것인가. 여당에 대한 인치(人治)도 안 되고 방치도 곤란하다니! 명확한 규정, 엄격한 집행이 몸에 밴 법치주의자 대통령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필자는 윤 대통령이 주변을 맴도는, 권력의 꿀이 발린 속삭임을 멀리하고,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역사의 휘파람에 귀 기울인다면 대통령-여당 관계를 원만하게 풀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역사의 휘파람? 역대 대통령들의 고단한 역사가 보여주었듯이 대통령-여당 관계는 정답이 없는 영역이다. 한때 서슬 퍼렇던 전직 대통령도, 정치9단이라던 김영삼·김대중 대통령도 모두 실패했던 문제가 대통령-여당 관계이다. 너무 꽉 쥐려 해도 실패하고 너무 느슨해도 되는 일이 없는 것이 여당과의 관계다.

#5. 결국 역사가 주는 교훈은 대통령-여당 사이의 민주적 밀당(밀고 당기기)만이 대안이라는 것이다. 민주적 밀당의 세계는 법의 세계와는 사뭇 다르다. 명확한 규칙도 분명한 선악의 구분도 없다. 대통령 리더십과 시민 삶이 걸린 핵심 이슈에서 대통령은 여야의 일치된 지지를 엄격하게 이끌어야 한다.

동시에 여당의 정치인들이 정치적으로 숨 쉴 공간과 여백을 주어야만 한다. 파벌을 짓고 권력 경쟁을 하는 의원들에게, 그리고 어떻게든 주목도를 높여보려는 꿈나무들에게 그들의 공간을 허(許)하라. 물론 법치주의자 대통령에게 쉽지 않은 주문이다.

#6. 필자는 윤석열 정부가 성공하길 바란다. 파국적 분열과 다수결의 숭배로 비틀거리는 한국 민주주의에 법치주의라는 방파제를 착실하게 쌓아놓은 정부가 되길 간절히 희망한다.

윤 정부가 살고 한국 민주주의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윤 대통령이 난제를 풀어야만 한다. 그 역사적 해법은 바로 법치, 정치, 인치의 세계를 섬세하게 구분하고 상황에 걸맞은 유연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마치 수시변역(隨時變易) 하듯이. 여당과의 밀당은 이러한 수시변역 리더쉽의 시험대이다.

장훈 중앙대 교수·본사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