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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승중의 아메리카 편지

아테네의 성 파업, 한국의 출산 파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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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참혹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한창이었던 기원전 411년, 아테네 남정네들이 아크로폴리스 문턱에서 주춤주춤하고 있다. 아테네 여인들이 ‘섹스 파업’을 하고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해버렸기 때문이다. 전쟁을 일삼는 남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며 아테네와 스파르타 두 도시국가 여인들이 한마음으로 뭉쳐서 성(性) 파업을 한 것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 시대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반전(反戰)의 이념을 코믹하게 전달한 희극 ‘리시스트라테’ 중 한 장면이다.

출산율

출산율

지난해 연말 7개월 된 딸을 데리고 귀국했을 때 신기한 체험을 했다. 어딜 가나 “어머나 아기다! 아유 귀여워!” 감탄을 연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공공장소에서 아기 보는 거 참 오랜만”이란 말도 들었다. 그리고 몇 주 후 “사우스 코리아의 여성들이 아기 낳기 파업하다”는 제목의 뉴욕타임스 기사를 읽었다.

2500년 전 아테네에서 일어난 섹스 파업이 오늘날 한국에서 현실화한 것일까. 아테네의 파업은 가상이지만, 한국의 파업은 현실이다. 아테네 여성의 파업은 반전이라는 목표가 있었지만, 한국 여성의 파업은 목표가 뭘까. 원인 분석으로 사회적 환경이나 복지 문제를 운운하지만, 아기 낳기에 관한 복지가 한국처럼 잘돼있는 곳도 드물다. 이번에 귀국했을 때 공공장소에 설치된 수유실들을 보고 놀랐다. 세계 어디를 가도 이런 수준의 시설은 보지 못했다.

출산율이 떨어지는 현상은 모든 선진국이 겪는 트렌드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국가소멸 사태가 우려될 만큼 그 정도가 파격적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젊은이들이 불확정성의 미래로 자기 존재를 송두리째 던지는 실존적 결단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문명 전환의 첨단에 서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인구과잉으로 시달리는 인류 전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말이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