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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지면 떠오른다, 바다 위 달 같은 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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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9호 24면

서산 간월도 일몰 여행

썰물 때는 육지와 연결되는 길이 드러나면서 뭍이 됐다가 밀물 때면 바다 위 홀로 뜬 섬이 되는 신기한 곳, 충남 서산 ‘간월도(또는 간월암)’의 일몰이 시작되고 있다. 김상선 기자

썰물 때는 육지와 연결되는 길이 드러나면서 뭍이 됐다가 밀물 때면 바다 위 홀로 뜬 섬이 되는 신기한 곳, 충남 서산 ‘간월도(또는 간월암)’의 일몰이 시작되고 있다. 김상선 기자

지난달 열린 ‘2023 프리즈 LA’ 아트페어에서 세계적인 조각가 배리 엑스 볼을 만났다. 그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같은 과거의 유명 조각을 3D 스캔 후 자신만의 해석을 녹여 새로운 조각을 창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왜 이렇게 번거롭게 작업하나 물었더니 “과거에 멈춘 엔딩 포인트(종점)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스타팅 포인트(출발점)로 삼는 과정”이라고 답했다. 이 얘기를 들으면서 겨울과 봄이 교차하는 3월 초 여행지로 서해안 일몰이 떠올랐다. 하루의 끝이라고 생각한 그 찰나에 내일의 시작을 떠올리게 하는 일몰만큼 아름답고 에너지 샘솟는 풍경이 또 있을까.

무학대사, 깨우침 얻어 간월암 창건

나무를 잘라 곧게 다듬지 않고 휘어진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용한 ‘개심사’ 심검당의 벽면.

나무를 잘라 곧게 다듬지 않고 휘어진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용한 ‘개심사’ 심검당의 벽면.

서울에서 2시간이면 도착하는 충남 서산의 간월도는 바닷물이 밀려들어오면 섬이 되고, 빠져나가면 육지와 연결되는 길이 드러나 뭍이 되는 신기한 곳이다. 크기도 손바닥만 해서 섬 내 유일한 건축물인 간월암이 곧 간월도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사였던 무학대사가 수도하던 중 바다 위에 뜬 달을 보고 도를 깨우치면서 그 자리에 사찰을 창건하고 암자 이름을 간월암(看月庵), 섬 이름을 간월도라 했단다.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폐사됐던 것을 1941년 만공선사가 중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음전·산신각·요사채 그리고 200년 된 사철나무가 서 있는 앞마당이 전부인 간월암(이자 간월도)은 한 바퀴 둘러보는 데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대신 바깥 풍경은 그야말로 망망대해, 한 없이 크고 넓다. 시야에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갯벌을 담고, 긴 호흡으로 차고 맑은 바닷공기를 가슴에 담으면 바다 위로 둥실 떠오를 것만 같다. 갈매기들이 끼룩대는 소리, 바닷물이 찰랑대는 소리, 맑은 풍경 소리, 그리고 작은 종이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바다 쪽으로 난 반원의 난간에는 색색의 작은 연등이 걸려 있고, 연등마다 소원을 적은 종이들이 묶여 있다. 바스락 바스락. 간월암에 부딪치는 바람이 종이에 담긴 애틋한 바람들을 한 장 한 장 읽고 있는 것 같다.

이제 이번 여행의 진짜 목적인 간월암의 일몰을 마주할 때다. 간월암의 일몰은 간월도에서 빠져 나와야만 만끽할 수 있다. 간월암 난간에 기대 일몰을 봐도 좋겠지만, 저녁이 되면 간월암에서 관람객을 사절한다. 혹여 밀물로 길이 없어지면 갇힐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간월암 일몰을 제대로 즐기려면 간월로 해안가 어느 지점으로 자리를 옮기는 게 좋다.

하늘이 발갛게 물들고, 바다 위 윤슬이 은은히 반짝일 때, 바닷길이 사라진 간월암은 마치 하늘에 뜬 것처럼 보인다. 일본의 유명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가 ‘천공의 섬 라퓨타’의 영감을 얻었다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프랑스의 유명 관광지 ‘몽생미셸 수도원’이 부럽지 않다. 누군가는 벌써 하루가 지났다고 아쉬워 하겠지만, 누군가는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냈다며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기를 기대할 것이다. 일몰이 선사하는 이 담백한 희망이 좋다.

겨울과 봄의 경계를 여행하기에 좋은 장소로는 간월암에서 차로 20여분 떨어진 개심사도 좋다. 백제 의자왕 14년(654년)에 혜감국사가 창건했다는데, 현재는 대웅전의 기단만 백제 때 것으로 남았다. 건물은 조선 성종 6년(1475년) 산불로 소실된 것을 성종 15년(1484)에 중건했는데, 그 햇수만 539년이니 고찰 특유의 고즈넉함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대웅전을 뒤로 하고 서면, 오른쪽에 심검당, 왼쪽에 무량수각, 전면의 안양루가 ㅁ자 마당을 중심으로 한눈에 들어올 만큼 사찰 크기가 아담해서 왠지 마음이 더 편안해진다. 심검당을 비롯해 사찰 곳곳에서 휘어진 기둥을 곧게 다듬지 않고 그대로 쓴 모습을 볼 수 있다. 자연과 한데 어우러져 있는 그 작은 풍경들이 또 한 번 마음을 다독인다. 특히 개심사는 4월 중순이면 국내에서 보기 힘든 ‘청벚꽃’이 개화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주차장에서 일주문을 지나 사찰로 이르는 길 풍경도 자연의 위로 그 자체다.

생굴에 소금과 고춧가루를 버무려 담근 ‘어리굴젓’은 전국에서도 서산 간월도산을 으뜸으로 친다.

생굴에 소금과 고춧가루를 버무려 담근 ‘어리굴젓’은 전국에서도 서산 간월도산을 으뜸으로 친다.

굴을 비롯해 버섯·대추·은행 등을 넣고 지은 영양굴밥.

굴을 비롯해 버섯·대추·은행 등을 넣고 지은 영양굴밥.

간월도로 들어가는 길목 식당마다 ‘어리굴젓’ ‘영양굴밥’을 판다. 간월도 주변 갯벌에서 채취한 자연산 굴은 조선 태조 때부터 임금께 진상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조수간만의 차로 성장이 늦어 작지만 육질이 단단하며 감칠맛이 있고, 몸통에 잔털이 있어 양념을 잘 흡수한다. 특히 어리굴젓은 충청도의 대표 향토음식으로 생굴에 소금과 고춧가루를 버무려 담근 젓갈인데, 예부터 서산 간월도산을 으뜸으로 꼽았다. 어리굴젓의 ‘어리’는 ‘아리다(맵다)’에서 왔다.

게국지 vs 꽃게김치찌개 명칭 논쟁도

간월도 주변 식당들에서 굴밥을 시키면 반찬으로 어리굴젓이 함께 나온다. 갓 지은 뜨거운 굴솥밥 한 숟가락에 차갑고 매콤한 어리굴젓 한 조각을 얹으면 비릿한 바다내음과 매운 단맛이 입안을 채운다. ‘굴회무침’ ‘굴물회’도 별미다.

서산의 대표적인 향토음식 ‘게국지’. 간장게장을 담가 먹고 남은 간장에 갯벌에서 주운 작은 게를 빻아 넣고 버무린 다음, 쌀 뜨물을 조금 붓고, 김장하고 남은 쭉정이 배추와 무청을 함께 지져낸 음식이다.

서산의 대표적인 향토음식 ‘게국지’. 간장게장을 담가 먹고 남은 간장에 갯벌에서 주운 작은 게를 빻아 넣고 버무린 다음, 쌀 뜨물을 조금 붓고, 김장하고 남은 쭉정이 배추와 무청을 함께 지져낸 음식이다.

일몰을 보느라 얼었던 몸을 달래려면 ‘게국지’가 제격이다. 서산~태안 일대 식당 중에는 ‘게국지’를 파는 곳이 꽤 있다. ‘겟국지’ ‘갯국지’ ‘깨국지’라고도 불리는 게국지는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았던 시절, 갯벌 마을 사람들의 살뜰함이 만들어낸 향토음식이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게국지 vs 꽃게김치찌개’ 논쟁이 한창인데, 꽃게 한 마리가 통으로 들어간 것은 게국지가 아니라 꽃게김치찌개라는 논란이다.

50년 넘게 고향 서산을 지키고 있는 문화해설사 김재신(61)씨에 따르면 게국지는 “무녀리(못난이·쭉정이를 부르는 말)들까지 살뜰하게 챙긴 따뜻한 음식”이다. 주 재료가 그렇다. 우선 필요한 간장은 꽃게·박하지(돌게) 등으로 담근 게장을 다 먹고 남은 것이다. 이 간장에 능쟁이·황발이 같은 작은 게와 간장게장을 담고 남은 무녀리 박하지를 절구에 넣고 빻아 으깬 것을 버무린다. 여기에 김장철에 남은 무녀리 무청과 배추를 소금에 절였다가 함께 버무린 다음 쌀뜨물을 붓고 늙은 호박·대파와 함께 지져낸 것이 바로 게국지다. 김씨는 “고추장·된장은 안 넣고 고춧가루만 넣는데 이 고춧가루도 무녀리다. 빛깔 고운 고추는 팔거나 딸·며느리 주고 빨강·초록이 섞인 끝물고추는 버리기 아까워 대충 빻아뒀다가 집에서 쓴다”면서 “그래도 껍질 벗긴 늙은 호박과 대파를 덤벙덤벙 썰어 넣고, 무도 나박나박 썰어 넣고 끓이면 찬바람 불 때 다다분한(정제 설탕의 단맛이 아닌 천연 단맛) 맛이 나서 최고”라고 했다.

바다는 가깝고, 갯벌에서 잡은 작은 게들로는 간장게장 담기 그렇고, 냉장시설은 안 좋고. 그렇게 시작된 음식이 게국지이니 요즘처럼 ‘꽃게 한 마리 통째’ 넣는 것은 원조가 아니다. 하지만 어쩌겠나. 어쩌다 들리는 도시인들에게 “여기 으깬 게가 잔뜩 들었소” 한들 믿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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