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외비’ 이성민 “연기,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무지개 같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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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개봉한 영화 '대외비'에서 배우 이성민은 부산 정치판을 물밑에서 쥐락펴락하는 은둔 실세 권순태를 연기했다.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1일 개봉한 영화 '대외비'에서 배우 이성민은 부산 정치판을 물밑에서 쥐락펴락하는 은둔 실세 권순태를 연기했다.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연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 같아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무지개 같달까.”

대한민국에서 연기력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배우에게서 나온 말치고는 지나친 겸손으로 들렸다. 지난해 하반기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JTBC)에서의 연기로 호평 세례를 받은 배우 이성민(55)은 자신의 지난 작품들을 보면 “다시 하고 싶다는 아쉬움이 들 때도 많다”며 “그런 마음이 덜 들게 하기 위해 항상 더 긴장하려 한다”고 말했다. 영화 ‘대외비’ 개봉(1일)을 앞두고 지난달 말 서울 소격동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신작) 개봉이 다가오니 슬슬 또 스트레스가 몰려온다”며 30년 넘는 연기 경력에 따르는 무거운 책임감도 털어놨다.

‘대외비’는 1992년 총선을 배경으로, 부산 지역구 텃밭을 착실히 다져온 전해웅(조진웅)이 정치판 비선 실세로 인해 공천에서 떨어진 뒤 ‘악’과 결탁하면서 벌어지는 치열한 파워게임을 그렸다. 이성민이 연기한 권순태는 뚜렷한 직업도, 직함도 없지만 물밑에서 정치판을 쥐락펴락하는 권력자로 묘사된다. 대본에 순태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았지만, 이성민은 짧게 자른 스포츠머리, 콧수염과 같은 외형적 디테일을 직접 제안해가며 캐릭터를 구축했다.

“이 사람이 원래 정치를 하던 사람인지 혹은 그냥 깡패인지조차 불분명했는데, 감독에게 심각하게 묻지는 않았어요. 인물 자체가 관객들에게 그런 (베일에 싸인) 느낌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다만 예전부터 ‘짧은 머리에 콧수염이 있는 역할을 한번 해봐야지’ 싶었는데, 이 영화에서 써먹어 버렸네요. (웃음)”

이성민은 짧은 스포츠 머리, 콧수염 등 어둠 속 권력자로서 권순태의 면모를 드러내는 외형적 특징을 구체적으로 상상해 감독에게 먼저 제안했다고 한다.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이성민은 짧은 스포츠 머리, 콧수염 등 어둠 속 권력자로서 권순태의 면모를 드러내는 외형적 특징을 구체적으로 상상해 감독에게 먼저 제안했다고 한다.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실존 인물 연기, 보다 보면 본능적으로 닮아가”

이성민이 최근 선보인 캐릭터들은 얼핏 비슷비슷한 인상을 준다. 지난해 10월 개봉한 영화 ‘리멤버’에서는 알츠하이머를 앓는 80대 노인으로 분했고, ‘재벌집 막내아들’의 진양철과 ‘대외비’의 권순태는 나이는 정확히 드러나지 않지만 부를 축적한 노년의 권력자라는 공통점만큼은 분명하다.

찍어둔 작품들의 공개 시기가 우연히 몰리면서 ‘노인 전문 배우’라는 수식어까지 따라붙었지만, 이성민으로서는 인물마다 제각기 다른 접근법이 필요했다. “‘리멤버’의 노인은 살아온 삶이 만만치 않았고 가장 고령이기 때문에 꼼꼼히 확인하면서 연기하느라 굉장히 힘들었어요. 진양철은 근현대사 속 여러 인물들이 묘하게 겹쳐 보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점을 신경 썼죠.” 반면, ‘대외비’의 순태는 모호하게 그려져 있어서 “오히려 연기하기 편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자칫 기시감이 들 수 있는 인물들을 맡으면서도 매번 고유한 색깔을 내는 연기에 무슨 비결이라도 있을까 싶어 물었지만, 그는 “인물 특징을 따로 연습하진 않는다”고 했다. “어릴 땐 (캐릭터 분석을) 거의 논문 급으로 했었죠. 근데 아무 소용이 없더라고요, 하하. 요즘엔 워낙 유튜브 같은 게 발달돼있으니까 특정 인물을 연기해야 하면 아무 생각 없이 자료들을 많이 봐요. 그러다 보면 따로 연습하지 않아도 그냥 정서적으로, 본능적으로 닮아가는 것 같아요. 어떤 이미지, 혹은 느낌 하나를 잡아서 변주를 주는 편입니다.”

이성민은 '대외비'에서 호흡을 맞춘 조진웅에 대해 "주연일 때도 옆으로 비켜줄 줄 때와 조화를 아는 배우"라며 "내가 갖고 있지 않은 많은 장점들을 갖고 있다"고 칭찬했다.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이성민은 '대외비'에서 호흡을 맞춘 조진웅에 대해 "주연일 때도 옆으로 비켜줄 줄 때와 조화를 아는 배우"라며 "내가 갖고 있지 않은 많은 장점들을 갖고 있다"고 칭찬했다.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재벌집’ 인기? 1달 예상…내 인생 가끔 불쌍하다”

그는 꼿꼿한 권력자 역할을 많이 해온 건 본인이 원해서라기보다 ‘박통(박정희 전 대통령)’을 연기한 ‘남산의 부장들’(2020) 이후 유사한 제안이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제 너무 각 잡히지 않은, 좀 풀어진 연기를 하고 싶다”는 그는 ‘대외비’의 경우 “‘파우스트’가 생각나는 시나리오가 너무 좋아서” 선택했다고 했다. “이원태 감독의 전작 ‘악인전’(2019)을 너무 재밌게 봐서 대본을 유심히 봤거든요. 욕망과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파우스트’가 생각났는데, 감독도 비슷한 생각을 하셨더라고요.”

스무살 무렵 연극 무대에서 연기를 시작한 이성민은 데뷔 20여년 만에 첫 영화 주연을 맡는 등 늦게 빛을 본 케이스다. “돌이켜보면 20대 때 막연히 상상만 해봤던 것들을 다 이룬 것 같다”는 그는 막상 그러고 나니 “책임이 따르고 스트레스가 많다”고 털어놨다. “사람들은 배우를 굉장히 여유로운 직업이라고 생각하지만, 극도로 예민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업”이라며 오전 3시부터 오후 3~4시까지 5분 간격으로 촘촘히 설정된 핸드폰 알람을 보여줬다.

요즘 전성기를 실감하느냐는 질문에 “전혀 아니다. ‘재벌집 막내아들’ 잘 됐을 때도 (인기가) 한 달 정도 가겠거니 했다”며 쿨하게 웃은 그는 “그래도 함께 작업한 배우들이 다 잘 되니 너무 좋았다”고 했다.

“곧 만료 기한이 다가오는 제 여권에는 도장이 두세 개 밖에 안 찍혀 있어요. 잘 쉴 줄 모르는 내 인생이 가끔 불쌍하기도 해요. 그래도 잊을만하면 몇 년에 한번씩 잘되는 작품이 있으니, 죽으란 법은 없구나 싶습니다. 그런 데서 살아갈 맛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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