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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신입생들의 자유를 기원한다, 생존 너머를 상상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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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2023년 새 학기, 대학 새내기들에게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1980년 서울대 신입생이었던 어떤 이는, 그해 봄을 잊을 수 없다. 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가 계엄령을 선포한 것이다. 꽃들이 자지러지듯 피어난 어느 봄날, 교정에 탱크가 진주했다. 꽃들이 소스라치듯 피어난 어느 봄날, 기숙사로 군인들이 난입했다. 퍽! 군인들은 욕설과 고함을 지르며 학생들을 구타했고, 학생들은 쫓기듯 기숙사 복도에 집합했다. 그는 다행히(?) 양주 한 병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기 방에 난입한 군인에게 그 양주를 서슴없이 건넸다. 그렇게 그는 구타를 피할 수 있었다. 복도로 쫓겨 나와 일렬로 선 학생들은 머리를 차가운 바닥에 대고 엎드렸다. 참다못한 기숙사 조교가 벌떡 일어섰다. “나도 군대에 다녀왔어! 그런데 이게 뭐하는…”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조교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다.

독재시대 자유의 여러 형태

이렇게 대학 시절을 시작한 세대에게 자유의 의미는 분명했다. 이 야만스러운 군부독재로부터의 자유. 일주일이 멀다 하고 데모가 이어졌고, 그러한 정치적 저항은 1987년 직선제를 수용하기까지 지속하였다. 군부독재로부터의 자유라는 그 활활 타오르는 명분 속에서 다양한 자유가 시도되었다. 독재에 저항할 자유, 대안적인 사회를 꿈꿀 자유, 법질서를 무시할 자유, 밤거리에서 방뇨할 자유, 그리고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될 자유.

그 시대에는 공부에 집중하지 않아도 될 명분이 널려 있었다. 다양한 이유로 휴강이 밥 먹듯이 이루어졌고, 교수들은 정치권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기 위해 수업을 일찍 끝내는 적도 있었다. 한 학기 수업이 끝나도록 책 한 권 읽지 않는 나날들이 흘러갔다.

세월은 흘렀고, 민주화는 이루어졌고, 경제는 성장했으며, 1980년 신입생이었던 그는 대학원생이 되었다. 지금은 어느 대학의 고위 보직자가 된 그가 마침내 박사학위를 받던 1994년 봄,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대학신문에 ‘살아있는 정신에게-자유인의 표상에 부쳐’라는 글을 기고한다. 그 글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군의 입학이 유독 축복을 받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1980년대식 자유는 독재에 저항
1990년대식 자유는 고독의 직면

오늘날 캠퍼스엔 취업 공포 만연
눈앞의 생존에 집착하지 말기를

앞으로 시간이 더 빨리 흘러갈 것
대학 공부는 인생의 ‘필리버스터’

30년 전 김윤식 교수의 일갈

김영민의 생각의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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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신입생에게 찬물을 끼얹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른바 명문대학에 입학해서 기쁨과 자부심에 차 있을 학생들에게, 이 대학입학은 너희의 성취가 아니라고 일갈한다. “우연히도 군은 밥술이나 먹는 집에서 태어났고 그 때문에 고액의 과외 또는 재수도 할 수 있었고 혹은 튼튼한 육질과 맑은 귀를 유지할 수 있지 않았던가. 밥은 잘 먹었느냐, 잘 잤느냐, 내복 입었느냐, 공부했느냐고 묻는 보살핌 속에 군이 놓여 있지 않았을까.” 즉, 잘 먹고 잘사는 집안에 우연히 태어난 결과로, 이른바 명문대학에 입학한 것이니 무엇이 그리 자랑스러울 게 있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노력으로 당당히 명문대학에 입학한 영재들이 아니라고? 이게 우리의 자랑스러운 성취가 아니라고? 이렇게 반문할 법한 신입생들이 있었을 것이다. 고교 시절 내내 인내를 거듭했을 이라면 응당 보일 만한 반응이다. 그런데 김윤식은 그들을 한마디로 이렇게 규정한다. 돼지. 너희는 돼지다.

왜 돼지인가? 김윤식은 명문대 신입생을 두고 왜 돼지라고 불렀는가? 대학입학은 그들의 성취도 아니었을뿐더러 심지어 그들의 ‘선택’도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기르는 강아지조차도 군의 안색을 살피는 그런 속에서 군은 살았다. 무슨 대학을 가야 된다든가, 무엇을 전공해야 된다는 것도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갈데없는 돼지였다.”

갈데없는 돼지, 결국 노예 아닌가

자신의 인생 행로를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존재라, 그런 존재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김윤식은 그러한 학생들을 노예라고 불렀다. 김윤식이 보기에, 그들을 노예로 만든 이들은 다름 아닌 그들의 ‘아비 어미’였다. “군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 그들은 아마도 사랑이란 위선의 이름으로 그렇게 했던 것이리라.” 그들은 사랑이라는 위선의 이름으로 신입생들이 처한 진정한 존재 조건을 가려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존재 조건이란? “군은 다만 태어났을 따름. 던져진 존재였던 것. 어디에 던져졌던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 아니겠는가. 거기 군은 혼자 던져졌고 따라서 불안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혼자 있음, 불안, 무서움, 이 삼각형의 도식이 군의 본래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존재 조건을 신입생들이 계속 외면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대학은 자유를 추구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대학에 온 이상 학생들은 수험서가 아니라 인간의 조건을 또렷이 응시하는 텍스트를 읽을 것이라고, 김윤식은 믿었다. “그 계기란 도처에서 예감처럼 온다. 군이 창공의 별을 응시할 때 온다. 헤겔을 읽을 때 온다. 『무진기행』을 읽을 때 온다. 릴케를 읽을 때 온다.” 그렇게 읽고 읽다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고독한 자신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결과, 불안과 공포에 떨게 될 것이다. 김윤식은 단언한다. “이 짐은 아무도 벗어날 수 없다.”

고독과 공포에 물든 자유의 축복

“혼자 있음으로 말미암아 감당해야 될 불안과 공포를 대가로 하여 비로소 얻어진 권리.” 김윤식은 자유를 이렇게 규정했다. 이제 더 이상 군부독재와 같은 절대다수가 합의하는 명징한 악은 없다. 그 악에 저항하는 것만으로 자유가 되는 시대는 저물었다. 이제 너는 혼자다. 자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이렇게 김윤식은 말한 것이다.

그런데 고독과 공포로 물든 이 자유야말로 축복할 일이다. 대학입학이 축복할 일이라면, 그건 바로 대학이 자유를 추구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윤식은 이렇게 글을 맺는다. “‘살아 있는 정신’이라 부르는 이 자유 앞에 군은 지금 서 있다. 군의 입학이 축복받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 장면에서이리라.”

이 글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판에 박힌 신입생 입학 축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명문 학교에 들어온 학생들의 ‘알량한’ 자부심에 아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명문대학의 거대한 네트워크에 진입했으니 이제 든든할 거라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트워크가 아니라 고독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입시에 성공한 것은 대체로 우연 때문이라고 적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관되고 명시적인 ‘경멸’을 서슴없이 내세웠기 때문이다. 너희는 돼지다. 너희는 노예다. 너희가 자유를 추구하지 않는 한, 돼지이거나 노예일 뿐이다.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지난 30년 동안 길 잃은 대학

김윤식이 저 글을 쓴 지도 약 30년이 지났다. 저 글을 아련한 향수 속에 바라보게 되는 것은, 단지 30년의 간극 때문만은 아니다. 그 30년 동안, 대학은 착실하게 길을 잃었다. 누군가를 짐짓 경멸하는 사람이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할 지적, 도덕적 권위가 사라졌다. 한때 대학의 권위를 수호했던 수문장들은 그 세월 동안, 노골적인 도덕적 타락, 과도한 출세욕, 퇴색한 감수성, 망실된 총기, 깊어진 우울증과 더불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너나 할 것 없이 대학의 개혁을 외쳤으나, 그 말에 값하는 개혁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학이 길을 잃은 줄 몰랐거나, 알아도 대충 알았거나, 진심으로 개탄하지 않았거나, 개탄하는 와중에도 꾸준히 눈치를 보았거나.

그리하여 마침내 대학은 완전히 길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이제 대학은 진리를 추구하기에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길을 잃었기에 자유로울 것이다. 거기에 입학한 신입생들도 자유로울 것이다. 지나치게 자유로울 것이다. 비문과 비약으로 가득 찬 주장을 해도 고쳐주는 사람이 드물기에 자유로울 것이다. 만만치 않은 숙제로 괴롭히는 사람이 드물기에 자유로울 것이다. 학점만 잘 주는 수업을 쇼핑할 수 있기에 자유로울 것이다. 신입생을 돼지라고, 노예라고 짐짓 경멸하는 교수의 외침으로부터도 자유로울 것이다.

대학은 이제 자유와 진리의 전당이기 이전에 산학협동의 전당이다. 학생들은 존재의 고독에서 오는 공포와 싸우기보다는 취직의 공포와 싸운다. 공포에 질린 포유류가 되어 앞다투어 취직이 용이한 곳, 학점이 수월한 곳으로 몰려간다.

대학 입학, 새로운 출발을 축하

누가 그들을 탓할 수 있으랴. 이 세상을 만든 것은 그들이 아니다. 기분에 의해 타인을 비방하고, 배척하고, 혐오하며, 명예를 거래하는 세상이 되었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서 먹고 사는 일은 중요하다. 모든 활동에는 경제적 기초가 있어야 하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취직과 돈벌이에 유념하는 것은 타당하고도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을 자유라고 부를 수는 없다. 오늘날 대학에도 자유가 있다면, 군부독재로부터의 자유나 존재의 고독에 직면할 자유가 아니라, 이 압도적인 생존 압력으로부터의 자유인 것처럼 보인다. 목전의 생존에만 집착한다고 과연 진짜 생존할 수 있을까. 생존 너머를 상상해야 생존하지 않을까.

어쨌거나, 입학을 축하한다. 이제 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시간은 더 이상 당신 편이 아니다. 대학 시절의 공부를 인생의 필리버스터라는 자세로 임하라.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른다는 생각이 들거든 플랭크(plank)를 하라. 시간이 실연한 거북이보다도 늦게 갈 것이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