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상상으로 버무렸다, 배달노동자·여공의 잔혹한 현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새 SF 소설집 『빛과 영원의 시계방』을 출간한 김희선 작가. 현직 약사인 그는 소설가의 삶과 약사의 삶을 오간다. 우상조 기자

새 SF 소설집 『빛과 영원의 시계방』을 출간한 김희선 작가. 현직 약사인 그는 소설가의 삶과 약사의 삶을 오간다. 우상조 기자

스웨덴 뇌과학자로 환생한 신라의 승려, 헌책방 지하실에 타임머신을 만든 시계 수리공, 살아있는 자동인형을 찾는 정부 요원….

김희선 소설 속 주인공들은 어느 하나 평범한 구석이 없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가 표출하는 문제의식은 무섭도록 현실을 파고든다. 그만큼 김희선은 허무맹랑한 상상에 현실의 잔혹함을 버무리는 데 능하다. 그 배경에는 약사(현실)와 소설가(비현실)로 양분된 그의 정체성이 있다.

빛과 영원의 시계방(소설가 김희선)

빛과 영원의 시계방(소설가 김희선)

약사이자 소설가인 김희선(51)은 2011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단편소설 ‘교육의 탄생’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단편 ‘공의 기원’으로 2019년 제10회 젊은작가상을, 같은 해 ‘해변의 묘지’로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받았다. 지난달 15일 나온 신작 『빛과 영원의 시계방』(허블)은 SF 단편 8편 모음집이다. 장편 『무언가 위험한 것이 온다』 이후 1년여 만에 신작을 발표한 김희선을 지난달 23일 만났다.

김희선은 이번 소설집에 영향을 준 문학 작품으로 신라 향가 ‘제망매가’를 꼽았다. 그는 “화자가 죽은 누이를 그리워하면서 불교의 극락세계 ‘미타찰(彌陀刹)’에서 만날 것을 다짐하는 구절을 좋아한다”고 했다. 이 구절에서 영감을 받아 나온 작품이 이번 소설집 중 ‘달을 멈추다’다. 생존이 어려워진 세상에서 인간의 뇌를 서버로 옮겨 영생을 누리려는 인물들을 그렸다.

SF라는 외피를 입고 있지만 김희선의 문제의식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동안 그는 소설에서 노인 소외, 감염병, 과로사 같은 사회적 소재를 다뤄왔다. 『빛과 영원의 시계방』에 실린 단편 중 그가 가장 애착을 갖는 작품은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배달노동자 문제를 다룬 ‘끝없는 우편배달부’라고 했다. “2018년 방사성 물질 라돈 검출 논란이 일었던 침대를 수거하던 50대 집배원이 과로 탓이었는지 돌연사하는 일이 있었다. 남들이 기피하는 물건을 옮기다 죽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마음 아팠다”고 소설을 쓰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단편 ‘가깝게 우리는’에는 “파란색 작업복을 입고 종일 고개를 푹 숙인 채 미싱을 돌리는” 여공들이 등장한다. “라디오 전파에 세뇌당한” 여직공들이 야근 수당을 요구하면서 도시락을 앉아서 먹고 추가로 30분을 쉬겠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자, 정부는 그들 대신 24시간 미싱을 돌릴 존재, ‘자동인형’을 찾아 나선다.

그는 “작가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소설보다 세상 바깥으로 뻗치는 작품을 쓰고 싶다”고 했다.

과로사 문제를 소설로 다루지만 정작 본인은 하루 5시간 수면 시간 이외의 대부분을 일하는 데 쓴다. 소설은 언제 쓰냐고 묻자 “퇴근 이후 새벽 3~4시까지 소설을 썼지만 앞으로는 건강 관리를 위해 취침 시간을 앞당기려고 한다”며 웃었다.

약사이자 소설가로 사는 것은 그에게 이중의 노동이 아니라 “한쪽의 스트레스를 다른 한쪽이 해소해주는 과정”이라고 했다. “소설은 허구를 지어내는 창의적인 작업이고 약 짓는 일은 엄밀한 조제법을 따르는 일이기 때문에 양쪽 일을 번갈아가며 하는 것이 리프레시(refresh)가 된다”는 것이다.

그의 차기작은 판타지다. “해방 이후부터 1960~1970년대까지 한국의 근현대사를 판타지로 버무린 작품”이라고 했다. 초능력을 가진 장년층 인물이 주인공이다. 그는 “역사물이라기보다 개인이 겪은 특이한 경험을 통해 한국사회를 드러내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