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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2035

알면서도 모른 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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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박태인 기자 중앙일보 정치부 기자
박태인 정치부 기자

박태인 정치부 기자

알면서도 모른 척을 했다며 조 단위 소송을 당한 회사가 있다. 미국의 폭스뉴스다. 전자개표기 회사인 도미니언 보팅시스템은 폭스뉴스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그 주변 인사들의 개표기 조작 등 투표조작설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퍼트려 손해를 봤다며 2년 전 16억 달러(약 2조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애초 도미니언에겐 어려운 소송이었다. 미국에선 언론이 허위임을 알면서도 보도했다는 ‘실질적 악의’를 입증해야 원고가 승소할 수 있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최근 미국 법원이 공개한 폭스뉴스의 내부 자료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아 보인다.

지난 24일 국회 본회의에 참석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검찰은 이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장진영 기자

지난 24일 국회 본회의에 참석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검찰은 이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장진영 기자

그 자료 속엔 폭스뉴스의 유명 진행자인 터커 칼슨이 지난 대선 직후 선거 조작설을 주장한 트럼프의 전 변호사 시드니 파웰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다른 진행자인 로라 잉그레이엄에게 보낸 문자가 나온다. 잉그레이엄은 “시드니는 완전히 미쳤다”고 답했다. 폭스뉴스 설립자인 루퍼트 머독 폭스코퍼레이션 회장도 선거 조작설에 대해 “정말 미친 짓”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폭스뉴스는 투표조작설을 비중 있게 다뤘다. 도미니언 측은 오로지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서라 지적한다. 폭스뉴스 변호인단은 “대선조작설과 관련해 찬반의 의견을 공정하게 보도했다”고 반박했다. 법원이 누구의 손을 들어주든, 진행자의 속마음과 일부 보도가 달랐다는 걸 부인하기 어려워 보인다.

‘알면서도 모른 척’은 이 시대의 새로운 대화법일지도 모르겠다. 이달 초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딸 조민씨가 김어준씨의 유튜브 방송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에 출연했다. 빼어난 외모부터 당당한 태도까지 모든 게 화제였다.

‘조국 사태’를 취재했던 기자로서 기억에 남았던 건 조 전 장관이 1심 선고 전 딸인 조씨에게 전한 당부사항이었다. 조씨는 방송에서 “A4 용지에 빼곡하게 뭘 쓰셔서 대문에다가 붙여 놓으셨다”며 “저희 아버지가 되게 꼼꼼한 성격이셔서, 공과금 언제 내라. 이런 것 적어놓으시고. 대문 앞에 쌓아 놓은 책을 순서대로 10권씩 넣어 달라. 이런 말씀이 적힌 거였어요”라고 했다. 조 전 장관은 수사를 받고 재판이 열릴 때마다 무죄를 주장해왔다. 그런데도 속으론 꼼꼼히 구속에 대비했다니 놀라웠다. 모든 상황을 준비해야 하는 처지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역시도 ‘알면서도 모른 척을 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법원은 그날 조 전 장관에 실형을 선고했다. 도망갈 우려가 없고 항소심이 남아 구속하진 않았다. 검찰은 지난 16일 제1야당 대표에게도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그 역시도 결백함을 주장한다. 다만, 불체포 특권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한다. 알면서도 모른 척을 하는 것은 아닐지, 의구심을 떨치기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