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염재호 칼럼

문명의 대전환과 기업의 역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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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우리나라 각 사회기관의 역할수행평가에 대한 한국리서치의 작년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정부를 비롯한 공공기관보다 대기업에 대한 긍정평가가 월등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각 기관이 자신의 역할을 잘하고 있는지 물은 결과, 10개 대상기관 가운데 코로나 등의 영향으로 의료기관이 72%로 가장 높았고, 다음으로 대기업이 52%로 2위였다. 대학교는 36%, 시민사회단체가 29%, 정부 및 공공기관이 26%, 종교기관이 21%, 언론사가 16%였으며, 정당은 5%에 불과한 신뢰도 수준을 보였다.

지난해 삼성전자 매출액은 300조원으로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의 14.5% 규모다. 현대자동차는 142조원, SK㈜는 134조원, 기아는 86조원, LG전자가 83조원의 매출을 기록한 것만 보아도 우리나라 GDP 총액 2057조원과 비교하면 대기업의 역할이 지대한 것을 알 수 있다.

문명전환기 기업의 끊임없는 혁신
경제 기여에 ESG 더하며 신뢰 상승
공적연금 대신 기업연금제 강화 등
사회문제 해결 앞장서는 기업 기대

최근 기업들은 회사와 주주의 이익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도 강조하는 ESG(환경·사회·거버넌스) 경영으로 획기적인 혁신을 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신기업가정신을 선포하고, 포스코는 기업시민 활동을 통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다. 이제 기업은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지 않고는 장기적인 경제 이익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되었다. 변화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렵기에 기업은 다른 어느 사회조직보다 빠르게 혁신한다. 반면 대학, 정부, 언론, 종교기관, 노동조합, 정당 등은 21세기 문명의 대전환기를 맞아도 변화에 무디고 혁신하려는 의지도 약하다. 문명 대전환의 해일이 몰려와 엄청난 변화를 요구하는데도 기득권에 안주해 20세기 틀에서 조금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최근 기업의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세기 관료제적 운영방식을 버리고 21세기형 유연한 근무환경을 조성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판교의 정보·통신(IT)기업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회사에서 피트니스, 사우나, 수면실, 음악감상실, 실내골프연습장, 무료 식음료 코너를 갖추는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자기 자리도 없고 출퇴근 시간 제약도 없는 자율근무를 하는 회사도 늘고 있다. 재택근무가 가능하고 유연한 휴가제를 채택하기도 한다. 배달의 민족으로 유명한 우아한 형제들에서는 근무지 자율선택제를 통해 온라인으로 협업이 가능하면 전 세계 어디에서나 근무할 수 있다고 한다. 직원들이 해외에서 한 달 살기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태국 치앙마이, 일본 도쿄, 호주 퍼스에서 현지생활을 즐기고 체험하며 일을 한다. 심지어 일 년 살기를 제주에서 하는 직원도 있다. 이제 디지털 혁명으로 근무환경의 제약 없이 일과 삶이 일체가 되어 어디에서든 일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비혼, 저출산, 높은 실업률, 잦은 이직 등과 같은 사회적 이슈에 기업들도 팔을 걷어붙여야 할지 모른다. 최근 우리나라뿐 아니라 프랑스에서도 연금개혁이 최대 정치이슈가 되었다. 정부가 주도하는 국민연금제도에 심각한 재정적자가 예상되자 미래 세대에게 더 많은 부담을 주고 더 적은 연금을 받게 제도를 개편하려 한다. 이에 젊은이들이 부당하다고 저항하는 것은 당연하다.

노인복지를 정부의 공적연금으로만 해결할 이유는 없다. 독일 기업들은 일찍이 직원들의 노인복지를 앞장서서 풀어나갔다. 티센크루프 엘리베이터로 유명한 독일의 철강회사 크루프는 이미 1858년에 기업 연금제도를 채택했다. 근속 5년이면 최종연봉의 15%, 35년 근속하면 75%, 사망하면 부인에게 50%, 자녀에게 5%가 지급된다. 랜덤하우스, 펭귄북스, BMG음반, RTL방송 등을 소유한 유럽 최대의 복합미디어 기업인 독일의 베텔스만도 기업연금제도를 통해 30년 근속한 직원에게 급여 42%를 평생 지불한다. 더 나아가 회사이익참여제도를 통해 기업의 세전 이익 전액을 종업원들에 나누어주고, 이를 다시 회사에 연 2%의 금리로 대출하되 25년간 출금할 수 없게 한다. 이를 통해 회사는 법인세 부담을 줄이고 안정적 자금을 확보할 수 있다.

이제 국민연금에서 사학연금처럼 직원과 회사가 공동으로 부담하는 기업연금으로 갈아타는 방안도 고려해볼 수 있다. 중소기업은 연합회 차원에서 기업연금제도를 만들 수도 있다. 일시적으로 회사의 이익이 늘어날 때마다 보너스 잔치를 하기보다는 회사가 연금이나 이익참여제도 등을 통해 미래를 위한 저축을 해두면 직원들은 노후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회사는 어려울 때 자금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요즘 기업의 이직률도 심각하다. 능력 있는 다른 회사 직원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연봉은 끊임없이 상승해 일본기업의 평균연봉을 추월한 지 오래다. 보너스와 연봉의 상승은 인플레이션과 노동생산성의 경쟁력 약화를 초래한다. 일과 삶이 일체가 되어 직원들이 회사를 가정처럼 공동체 의식을 갖고 장기간 일할 수 있는 터전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제 국가가 풀지 못하는 미래의 문제를 기업이 앞장서서 풀어서 다른 사회 집단에게도 혁신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해주면 좋겠다.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