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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국회에 발 묶인 반도체산업 지원법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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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용석 반도체공학회 부회장·성균관대 전자전기공학부 교수

김용석 반도체공학회 부회장·성균관대 전자전기공학부 교수

정부는 지난달 반도체 산업 등 국가전략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세제 지원을 강화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지난해부터 시설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율 상향 방안을 지속해서 논의해왔던 것을 생각하면 과정상 아쉬움이 남지만, 정부의 결정 자체는 상당히 고무적이고 환영할 만한 일이다.

지금 대한민국 반도체산업은 전례 없는 위기를 직면하고 있다. 그간 반도체산업은 글로벌 분업 구조의 효율성에 기반을 두고 성장해왔다. 하지만 세계적인 반도체 수급 부족 사태를 계기로 주요 국가들은 자국에 제조시설 확보 및 시장점유율 확대 경쟁에 나서고 있다. 이는 글로벌 분업 구조에서 한국의 특화 영역으로 여겨졌던 메모리 반도체 제조 분야가 위협받고 있다는 의미다. 그 어떤 나라보다 앞서서 반도체산업 지원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다.

세제 지원 강화하는 정부안 마련
미국은 의회까지 초당파적 협력
선두 못 지키면 경제·안보 흔들려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미국은 반도체를 국내에서 직접 생산함으로써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새로운 질서를 주도하고 있다.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정부 때보다는 조 바이든 정부 시대로 오면서 반도체 전략을 더욱 정교하고 일관되게 추진 중이며 의회도 초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의 제재로 초미세공정 반도체 개발은 막혀 있지만, 역량은 만만치 않다. 소위 레거시(구형) 공정에 대대적으로 투자하고 있고, 반도체 자급률도 올라가고 있다. 중국은 점차 한국산 메모리 반도체 의존도를 줄이려 할 것이다. 시스템반도체 설계능력을 더욱 강화하고 있으며, 3세대 반도체인 화합물반도체(질화갈륨·탄화규소)에 많이 투자하고 있다.

이제는 반도체 산업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져야 한다. 대기업 특혜, 부자 감세, 다른 산업과의 형평성 등 내부의 소모적인 논쟁에서 벗어나야 한다. 주요 선진국의 적극적인 반도체 산업 육성 의지, 글로벌 정책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중국·대만 등 주요 경쟁국이 앞다퉈 반도체 지원법을 통과시키며 유례없는 민간 투자 지원 정책을 펼치고 있는 상황을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한국이 반도체 제조 강국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선발국과의 제조시설 투자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반도체 생태계 전반의 원천기술을 보유하고,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선발국의 도전은 한국 반도체산업에 큰 위협이 아닐 수 없다. 반도체 제조업은 경쟁력 유지를 위해서 지속적인 첨단 제조시설 투자가 필요하다. 제조시설을 건설한 뒤 양산까지 최소 2년 이상의 기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적기 선행 투자가 매우 중요한 산업이다. 세계 1등을 유지해온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도 위협받고 있다. 미국 마이크론은 20년간 1000억 달러(약 129조원)를 투자하겠다고 한다. 중국 YMTC는 플래시 메모리 실력이 상당 수준까지 올라와 있다. 미국과 중국의 메모리 반도체 내재화 의지가 아주 강하다.

반도체 산업은 선행 기업이 시장을 독점하는 철저한 승자 독식 비즈니스여서 한번 주도권을 놓치면 회복이 사실상 불가하다고 볼 수 있다. 과거 화려했던 일본 반도체 산업이 한순간에 몰락한 사례를 돌이켜 보면 한국도 일본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지난 50년의 반도체 역사를 돌아보면 한국의 반도체산업은 늘 위기였다. 글로벌 반도체 패권 경쟁도 지금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의 위기와는 전혀 다른 수준의 생존 위기가 펼쳐지고 있다. 선발국이 주도하는 국가와 기업의 연합 간에 치열한 경쟁이 진행 중인데 이는 반도체산업 역사상 전례 없던 일이다. 과거처럼 개별 기업의 힘만으로는 지금의 위기에 대응하는 것은 역부족이다.

주요 선발국들이 각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전력 질주하는 상황에서 한국은 선발국들보다 더 멀리, 더 빨리 달려가야 한다.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크기 때문에 한국의 반도체 산업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국가 경제와 안보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 어느 때보다 심각한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 궁하면 통한다는 말처럼 절박감에서 해법을 찾고 실천해야 한다. 우리 국회도 소모적 논쟁에서 벗어나 ‘반도체 등 국가첨단산업의 세액공제율 개정’을 담은 조세특례제한법 정부 법안을 조속히 통과시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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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 반도체공학회부회장·성균관대 전자전기공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