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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용비리가 주차위반과 동급? 청년 희망 꺾는 불공정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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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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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2021년 7월 부산시교육청 지방공무원 9급 임용 시험에 응시했던 특성화고 학생 A군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합격자 발표 당일 A군은 합격자 명단에 포함돼 있었다. 그걸 보고 부산시교육청을 찾았는데, ‘불합격’으로 정정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부산시교육청은 “행정적 실수”라고 주장했다. A군은 귀가 뒤 생을 마감했다.

한데 1년쯤 뒤 A군의 죽음이 채용의 공정성을 훼손한 공무원에 의해 초래된 비극이란 사실이 밝혀졌다. 경찰 수사 결과 면접위원들이 합격자를 조작했다. 그냥 넘어갈 뻔한 이 사건은 당락이 뒤집힌 걸 확인한 유족이 경찰에 고소하면서 드러났다.

관련 공무원들은 형사처벌을 받았다. 이들에게 적용된 혐의는 공무집행 방해와 청탁금지법 위반 등이다. 청탁을 받고, 업무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업무방해죄가 적용된 것이다. 채용비리는 죄목에서 빠졌다. 희한하지만, 법이 그렇다.

채용절차법, 어겨도 과태료로 끝
납부 거부해도 마땅한 대책 없어
형사처벌 받을 땐 그나마도 면책
노동 현장서 형평성 논란 불거져

공무원 취업 준비생의 비극적 최후

인(人)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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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하게 따지면 업무방해죄는 기업이나 기관과 같은 사측의 입장을 기준으로 적용하는 죄다. 회사 업무가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방해했다는 의미여서다. 채용비리는 취업준비생 같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따지는, 을(乙)의 기준에서 보는 부조리다.

그러나 채용비리는 관련 법상 죄도 아니다. 채용비리를 막기 위한 별도의 법이 엄연히 있는데도 그렇다. 채용절차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채용절차법)이다. 그런데 이 법은 사법처리를 전제로 하는 형법과는 거리가 멀다. 일종의 질서법이다. 질서법은 위반해도 행정처분을 내리는 데 그칠 뿐이다. 채용비리가 발생해도 기껏해야 시정 명령을 내리거나 최고 수준의 처분을 해도 과태료를 매기는 게 전부다. 채용비리가 주차 위반 정도로 다뤄지고 있는 꼴이다. 굳이 처벌하려면 업무방해죄로 욱여넣듯 끼워 맞춰야 가능하다. 극단적 선택을 부를 정도로 청년에게 채용의 공정성은 민감한 사안이지만, 법은 을의 처지와 거리를 두고 있는 셈이다.

한데 이마저도 무시되기 일쑤다. 과태료 납부를 거부해도 정부가 취할 방법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저 목을 빼고 납부하기를 기다려야 하는 판이다. 법에 이런 ‘무대포 거부’를 조장하는 조항이 있어서다. 채용절차법 제17조는 채용 강요 등의 행위를 한 자에게 30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게 돼 있다. 그런데 단서가 붙어있다. ‘형법 등 다른 법률에 따라 형사처벌을 받은 경우 과태료를 부과하지 않고, 과태료를 부과했더라도 취소한다’고 돼 있다. 채용비리에 대해 사실상 어떤 제재도 못 하게 하는 희한한 면책 조항이다. 정부의 영(令)이 씨알도 안 먹히는 기막힌 상황이 ‘면책 법’ 때문에 벌어지는 셈이다.

지난해 5월 모 아파트 신축공사 현장에서 노조 간부가 난동을 피웠다. 공사를 맡은 전문업체와의 계약을 해지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 노조 소속 조합원을 쓰라고 떼를 썼다. 난동으로 공사가 멈추기 일쑤였다. 참다못한 사측은 노조 간부를 정부에 신고했다. 고용노동부는 조사를 거쳐 채용절차법상 채용 강요 행위로 과태료 1500만원을 부과했다. 경찰도 수사를 벌여 업무방해 혐의를 적용했다. 검찰이 기소했다. 하지만 노조 간부는 과태료 납부를 거부했다. “업무방해죄로 처벌받게 되면 과태료 처분이 취소될 것”이라면서다. 고용부 관계자는 “너무 당당하게 거부하는데 어이가 없었지만, 정부로선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대법원은 이와 관련 2021년 5월 판례를 내놨다. 기간제법을 위반한 회사에 대해 정부가 과태료를 부과하자 회사가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벌금형을 받았기 때문에 과태료를 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데 대해서다. 대법원은 행정기관의 과태료 부과도 정당하고, 형사처벌도 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질서법과 형법의 병과가 가능하다는 판결이다. 하지만 채용절차법 자체가 ‘과태료 부과 취소’를 명문화한 상태에선 무용지물이다. 대법원 판례와도 어긋나는 법이 산업현장에 적용되고 있는 꼴이다.

법 체계 전면 재검토 서둘러야

대법원 판례에도 일선 법원이 채용비리에 대한 행정제재(과태료 부과)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판결을 하기도 했다. 2021년 10월 모 주상복합건물 신축 공사현장에서 노조의 채용 강요와 비리가 발생했다. 고용부는 15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했다. 그러나 1심 법원은 “구체적으로 어떤 ‘법령’을 위반했는지 인정할만한 자료가 부족하다”며 아예 과태료 부과의 정당성마저 부정했다. 채용절차법이 법 대접도 못 받는 지경에 몰린 셈이다. 다행히 이 판결은 이달 진행된 2심에서 뒤집혔다.

산업현장을 비롯한 곳곳에서 기존 법조차 무용지물로 전락해서야 채용의 공정성을 기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현옥 고용부 청년고용정책관은 “채용의 공정성과 투명성이 청년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민감한 가치인지를 되새긴다면 사업주를 포함한 사회 곳곳의 기성세대 모두가 각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행히 고용부가 채용절차법 개정 작업에 착수했다. 과태료 취소 단서조항을 삭제하는 것은 물론 혐의가 심각할 경우 형사처벌까지 채용절차법으로 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청년의 눈물이 분노로 이어지기 전에 약자를 보듬고, 사회 질서를 바로 세우는 차원에서라도 서둘러야 한다. 공정성은 노동개혁이라는 거창한 수사(修辭)가 아니라도 마땅히 지켜야 할 기본적인 가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