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별 차이야 있겠지만, 인공지능(AI)이라는 단어가 널리 회자한 것은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A.I.’(2001) 이후이지 싶다. 그보다 1년 앞서 개봉한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의 가사도우미 로봇 앤드루(로빈 윌리엄스)가 제조상의 오류로 감정을 지니게 되었다는 설정과 달리 21세기형 피노키오 ‘데이비드’(할리 조엘 오즈먼드)는 처음부터 감정을 지니도록 만들어진 존재이다.
또 다른 영화 ‘I-로봇’(2004)에 명시된 ‘로봇 3원칙’은 이렇다. 첫째, 인간을 다치게 하거나 다치도록 방관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첫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 한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셋째, 이 두 원칙을 위배하지 않는 한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그런데, 이 세 원칙을 나름 깊이 통찰한 인공지능 ‘비키’는 ‘인간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존재는 인간’이라는 결론을 도출하고 그에 따라 인류를 멸망시키려 한다. 반면, 인류가 떠나버린 황폐한 지구에 남겨진 ‘월-E’(2008)는 본연의 일(청소)을 하루도 거르지 않을 만큼 성실할 뿐만 아니라 음악과 영화를 즐기고 바퀴벌레를 반려 곤충(?) 삼을 만큼 풍부한 정서를 지닌 꼬마 로봇이다.
‘무어의 법칙’ 폐기한 반도체업계
많은 것을 이룬 삶이 훌륭하다면
적더라도 고유한 삶은 아름다워
이렇게 먼 미래의 일이라고, 비현실적 상상에 불과하다고, 인공지능이 수행한 결과물이 아직은 신통치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 생각을 잠시 뒤로하고 요즘 ‘핫’하다는 대화형 인공지능 ‘챗GPT’(openai.com)와 마주했다. 한글 대화는 내용도 속도도 영 시원치 않다니 서툴지만 영문으로.
“트리스탄 화음과 반감 7화음을 비교 설명해 주세요.” 불과 몇 초 만에 답변을 내놓지만, 자세히 읽어 보니 오류투성이다.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수정해 주었더니 미안하고 고맙단다. 대화 내용을 학습하고 이후 답변에 반영할 것인지 물었더니 단호히 아니란다. 틀린 것은 인정하되 수정은 하지 않는다? 이건 또 무슨 경우? 특정 주제에 대한 논문 목차와 한 학기 분량의 강의계획서를 작성하라고 하니 이것 또한 깔끔하게 뚝딱 써 내려 간다. 그런데 이런…, 소제목 아래의 세부 내용이 한결같다. ○○에 대해 ‘논의하라’ ‘설명하라’ ‘분석하라’.
학술적 자료가 풍부한 질문은 어떨까? ‘주피터 교향곡 4악장의 음악적 위대함’을 물었더니 다소 추상적이지만 제법 괜찮은 대답을 내놓는다. ‘통일성에 기반한 복잡성, 주제의 전개, 대위적 수월성’ 등 다양한 측면에서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한다. “네가 언급한 내용의 출처를 밝혀주렴.” “죄송합니다, 저는 제가 학습한 것을 말씀드릴 뿐 그 출처를 밝히는 기능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학술논문은커녕 리포트 대필 도구로도 부족하다. “혹시 관련 시청각 자료를 제시해 줄 수 있을까?” “저는 문자 기반 서비스이므로 문자 이외의 자료는 제공하지 않습니다.” 내친김에 우리말로 시를 짓고 그것을 노랫말 삼아 노래를 지을 수 있겠냐고 물었더니 호기롭게 ‘그렇다’고 대답한다. 잠시 후 비문투성이 문장에 아연실색할 화음 진행을 제시한다. 음악에 특화된 인공지능이 아니니 그러려니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언론에 오르내리는 찬사는 정말 호들갑 아닌가 싶다.
마지막으로 물었다. “웹검색 엔진 서비스와 너의 차이점은?” “웹검색 엔진과 저 같은 언어기반 모델은 각기 자신만의 강점과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포괄적 정보를 제공하는 데 함께 사용될 수 있습니다.” 정보를 나열하는데 그치는 것과 그 정보를 언어로 정리하여 제시하는 것, 그것이 그 둘의 본질적 차이점인가 보다. 지금의 수준이 어떻든,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가 원하는 정보를 취득하는 시간이 획기적으로 줄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경험과 생산의 총량을 삶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100년 전의 두 배가 아니라 어림잡아 몇십 배의 삶을 산다. 물리적 시간(수명)의 증가가 의술 덕이라면 삶의 양적 증대는 교통수단을 비롯한 기술적 진보, 무엇보다도 ‘무어(G Moore)의 법칙’(집적회로 상의 트랜지스터 수가 2년에 2배씩 증가)에 힘입은 정보 취득과 처리의 용이성에 크게 기인한다. 그런데 그 법칙이 최근 폐기되었단다. 발열이라는 현실적 난제도 있었지만, ‘고도화’에서 ‘특화’로 패러다임을 전환하였기 때문이란다.
반도체 산업이 그리했듯이 우리 또한 유한한 삶에 최대한 많은 것을 이루고 담아야 한다는 무의식적 강박에서 벗어나도 좋을 때가 온 것은 아닐까? 80년 남짓한 시간을 집적회로 삼아 앎과 경험과 소유를 최대한 많이 쌓은 삶이 훌륭하다면 그 시간을 무엇에 어떻게 쓸지 정하고 그에 필요한 것을 가지런히 놓은 삶은 아름답지 않을까?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