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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차이나 박경렬의 미래를 묻다

과학기술의 본질은 협력…미·중갈등 이분법 넘어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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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갈수록 거세지는 기술패권 경쟁

박경렬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박경렬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부루마블’. 유년 시절 친구들과 둘러앉아 했던 추억의 보드게임이지만, 그 이름이 무슨 뜻인지는 정작 몰랐었다. 전 세계 도시의 부동산을 구매하고 체류비를 받아 상대를 파산시키기 위해 무한경쟁을 펼치는 승자독식 게임. 그 이름의 유래가 우주 속 우리의 지구를 뜻하는 ‘푸른 구슬 (Blue Marble)’인줄 알았다면 서로 덜 경쟁적이었을까.

‘블루마블’은 1972년 달을 관측하러 갔던 아폴로 17호가 2만9000㎞ 상공에서 우연히 찍은 사진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 속에는 빛조차 닿지 않는 어둠의 공간에 홀로 위태롭게 떠 있는 창백한 푸른 별. 지구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1970년대 환경운동이 남긴 것

인류는 거대한 인식의 전환을 맞는다. 땅에서 무한한 우주를 바라보다가 우주에서 유한한 지구를 보게 된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미국과 소련의 우주경쟁이 정점으로 치달은 때 한계 상황의 지구를 인식하게 해주었다. 인류는 경쟁적으로 달을 향해 갔지만 결국 협력이 절실한 우리를 돌아보게 해주었다.

1970년대 환경 운동과 국경과 이념을 초월한 국제협력은 이렇게 촉발되었다. 1972년 각국의 과학자·지식인이 모인 로마클럽의 보고서 ‘성장의 한계’는 1992년 리우 지구환경정상회의로 계승된다. ‘행성성(planetarity)’을 일깨워 준 블루마블이 지속가능 발전의 역사에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이유다. 전 지구적인 협력이 없었다면 2023년 현재 우리는 훨씬 위태로운 상황에서 더 암울한 미래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걱정을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미·중 대치에 과기교류 위축 양상
안보 중심의 편가르기 도움 안돼

기후·빈곤 등 인류 앞의 숱한 난제
전 지구 차원의 다각적 접근 필수

기술주권과 국제연구 모두 중요
한국도 산업·지역별 전략 나눠야

안타깝게도 최근 기술패권 갈등의 파고가 높아지면서 국가 간 과학기술협력의 공간은 점차 좁아지고 있는 모양새다. 미·중 패권경쟁이 격화되며 다자주의와 자유무역의 질서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급속한 성장을 바탕으로 기술 권위주의의 팽창을 도모하고, 미국은 대(對)중국 수출 및 인적교류 통제로 맞서고 있다.

이러한 구도에서 우리도 선택을 강요받는다. 협력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기술동맹 내로 한정되거나 순진한 상상으로 치부된다. 자유의 가치를 공유하는 우방국과 안보·경제적 이익 모두를 도모해야 함은 중요하다. 하지만 과학기술 정책에서 모든 담론이 패권경쟁 구도에 빨려 들어가는 것은 우려스럽다. 현장 연구자들은 중·러 학계와의 교류로 있을 혹시 모를 제재에 걱정한다. 고도성장기 과학기술을 경제의 수단으로만 보았다면 이제 모든 사안을 안보의 관점으로 편가르기 하는 분위기에 있다.

우리의 경제·안보이익 잘 따져야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아폴로 우주선이 달표면 너머로 보이는 푸른 지구 모습을 찍었다. [사진 NASA]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아폴로 우주선이 달표면 너머로 보이는 푸른 지구 모습을 찍었다. [사진 NASA]

과학기술을 이분법적 대결과 안보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은 단순하며 위험하다. 최근 기술패권 경쟁은 매우 다차원적이기에 그렇다. 경쟁에서 기술 우위를 확보하며 승리를 지향해야 할 분야와 협력을 추구해야 할 것을 구분해야 한다. 글로벌 공급망과 연구혁신 네트워크에서 한국의 위치는 12대 전략기술 중에서도 반도체·이차전지·수소·탄소중립기술 모두 다르다. 미·중 이분법에만 과도하게 주목하면 우리의 경제안보적 이익을 섬세하게 고려할 개별기술 및 산업별·지역별 대응 전략을 놓칠 수 있다.

기술규범의 전선 또한 다층적이다. 기후기술, 자율살상무기체계(LAWS)와 관련된 논의는 미·중, 미·러의 단순한 전선이 아닌,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첨예한 대립이다. 데이터 주권에서도 개인정보보호규정(GDPR)으로 인해 EU와 미국의 갈등이 있은 지 오래다. 글로벌 기술 거버넌스에서 과학기술계·산업계를 포함하여 협력을 다차원적으로 접근해야 할 이유다.

기술패권과 갈등의 시대에 우리는 왜 그리고 어떻게 협력해야 할까. 과학기술을 통한 협력에는 우리가 ‘배우는’ 협력, ‘나누는’ 협력, ‘모두가 함께하는’ 협력이 있을 것이다. 배우는 협력은 최첨단 과학기술 연구를 위한 기초과학협력, 국제공동연구이다. 기술갈등 속에도 국제공동연구와 민간교류가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 UC샌디에이고 연구진은 미·중 패권경쟁으로 인해 미국 생명과학자의 연구생산성이 전반적으로 감소했음을 보여주었다. 이는 워싱턴도 원하던 바가 아니다. 미국국립과학재단은 팬데믹 전 과학기술연구의 23%가 국제협력으로 가능했다고 밝혔다.

레이건과 고르바초프의 공조

패권경쟁의 시기 과학기술협력은 축소되어야 할까. 아니다.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도 핵심기술과 인권침해기술 분야의 위험을 관리하며 언제, 어떻게 과학기술협력을 진행할지 고민하고 있다. 지난해 말 MIT가 발간한 ‘대학에서의 중국 협력’ 보고서는 선택적인 협력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EU도 호라이즌 유럽(Horizon Europe)을 통해 경쟁력을 강화하고 과학기술협력을 주도하는 전략적 접근을 택했다. 한·미·중·러 등이 참여하고 있는 국제핵융합실험로(ITER) 공동연구도 기술갈등이 첨예했던 냉전기에 레이건과 고르바초프가 시작한 것임을 기억하자. 우리의 기술주권을 지키는 동시에 연구협력과 인재교류를 활성화하는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나누는 협력은 개발도상국의 발전을 위한 기술이전과 및 양자협력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개발도상국의 과학기술 역량을 높여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국격을 제고하고 우방을 확보한다는 명확한 목표가 있다. 높은 국격이 국익이다. 닮고 싶은 나라를 만드는 것은 인구절벽을 눈앞에 두고 있는 한국에 해외 인재를 유치하여 장기적으로는 우리의 산업과 연구생태계에도 기여할 것이다. 정부의 인도-태평양 전략에도 과학기술협력이 천명된 만큼 세부적인 이행계획이 수립되어야 할 것이다.

글로벌 협력은 생존의 문제

함께하는 협력은 왜 필요한가. 과학기술은 지정학을 넘어서야 한다. 기후위기·재난·질병·빈곤퇴치에 대응하는 글로벌 과학기술협력은 우리에겐 생존의 문제다. 미국의 국제정치학자 하스는 공통의 비전을 가진 각국의 과학기술자, 전문가 네트워크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공동체(epistemic community)로 설명했다.

1987년 채택된 ‘오존층 파괴물질에 관한 몬트리올 의정서’는 UC어바인 연구진을 포함한 과학자들의 끊임없는 연구와 설득의 결과물이다. 진실을 규명하고 힘의 논리에 굴하지 않는 과학기술인의 노력이 있었기에 공동 대응이 가능했다. 협력의 열매는 오존층이 뚜렷하게 회복되고 있다는 작년 10월 ‘오존층 감소에 대한 과학적 평가’ 보고서로 확인되었다.

글로벌 복합위기를 해결하는 데 과학기술협력의 중요성이 한층 커지고 있다. 네이처는 2011년부터 선정해온 ‘올해의 과학기술인’에 안토니오 구테헤스 유엔사무총장을 비롯해 정책 전문가(2명), 기후변화 전문가(3명), 국제보건학자(3명)를 선정하였다. 과학적 발견과 기술개발에만 초점을 맞췄던 과거와 달리 점차 과학기술의 전 지구적 가치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해준다.

기술경쟁의 시대에도 국제사회는 기후기술의 개발을 위한 공동 노력과 기술이전의 중요성을 재확인했다. 지난해 말 이집트에서 열린 기후변화당사국총회(COP27)의 주요 쟁점 중 하나는 개발도상국 연합인 77그룹(G-77)이 상정한 소외 국가를 위한 금융과 기술지원이었다. ‘손실과 피해’를 보상하는 기금 설립과 기술이전에 극적인 합의를 도출했다. 아직 구체적이지 않은 이 합의가 갈 길은 멀지만 우리가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과학기술협력의 공간을 마련했다.

한국이 과기협력 리더십 발휘해야

기술패권의 시대, 우리에겐 오히려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협력을 주도하는 것이 새롭게 갈 길이다. 이것은 순진하고 이상적인 외침이 아니라 전략이고 현실이다. 부루마블 게임은 승자독식으로 끝나지만, 현실의 ‘블루마블’은 한판 승부가 아니다.

국가전략의 관점에서 과학기술을 바라볼 때 가장 어려운 점은 과학기술의 이중성에 있다. 과학기술은 본질적으로 경쟁의 요소이지만 인류의 난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강력한 협력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경쟁과 협력의 이분법을 넘어 포괄적인 국가 과학기술정책을 수립하는 것은 어렵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한국의 과학기술 역량과 산업화의 역사는 세계가 주목한다. 그동안 우리의 역량에 비해 부처를 넘어서는 과학기술 외교와 협력의 철학을 정립하고 직접 국제사회에 목소리를 내는 데는 부족했다. 갈등의 시기 한국이 과학기술협력 의제를 선도적으로 발굴하고 다양한 민간협력과 양자, 다자협력의 장에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국제협력과 다자외교를 주도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정부의 글로벌 중추국가 비전에도 상응하는 길이다.

◆박경렬=서울대에서 화학생물공학과 외교학을 공부하고, 하버드 케네디스쿨에서 정책학 석사, 런던정치경제대학(LSE)에서 정보시스템과 혁신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아프리카와 인도네시아 현장에서 근무하였고 세계은행 이노베이션 랩을 거쳐 KAIST에 부임하였다. 공학과 사회과학, 이론과 실천, 한반도와 글로벌 사회의 경계인을 꿈꾼다.

박경렬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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