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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춘권(春卷), 봄을 돌돌 말아 먹은 뜻은?

중앙일보

입력

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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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돌돌 말아서 와사삭 베어 먹는 낭만적 음식이 춘권이다. 한자로는 봄 춘(春), 말 권(卷)을 쓰니 문자 그대로 봄을 말았다는 뜻이다. 미국 유럽에서도 즐겨 먹는데 영어 이름 역시 봄 스프링(spring)과 말 롤(roll)을 합쳐 스프링롤이다. 이름만 들어도 봄향기가 입 안 가득 퍼지는 느낌이다.

춘권 안 먹어본 사람은 거의 없어 모두 알겠지만 이 음식은 채소와 고기, 해산물 등을 밀전병에 싸서 만든다. 그대로 혹은 기름에 튀겨 먹는다.

봄을 말았다는 이름이 꽤나 시적이지만 춘권 자체만 보면 봄과 특별한 관련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왜 이런 서정적 이름이 붙었을까?

혹자는 새봄이 시작되는 춘절과 입춘에 먹었던 음식이라 춘권이 됐다고 하는데 그럴듯한 풀이지만 앞뒤가 바뀌었다. 입춘에 먹어서 춘권이 아니라 봄 음식이라 입춘에 먹었다.

춘권이 춘권(春卷)인 이유는 실제로 봄을 돌돌 말아 먹었기 때문이다. 계절을 물건 말 듯 감쌌다는 말이 실감나지 않지만 그 이름 속에 춘권의 유래와 의미, 역사와 풍속이 들어있다.

춘권은 평범하기 그지없지만 실은 뿌리가 꽤 깊은 음식이다. 1~2세기 후한 무렵부터 먹은 것으로 보니 역사가 최소 2000년쯤 된다. 이 무렵의 일 년 중 행사를 노래한 『사민월령』에 입춘이 되면 새로 돋아난 채소를 먹으며 봄이 온 것을 축하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춘권의 시작은 그러니까 봄 채소였다.

그러다 400~500년 쯤 후, 풍속에 다소 변화가 생겼다. 6세기 문헌인 『형초세시기』에 입춘이면 파와 마늘, 부추와 달래, 그리고 인도가 원산지인 흥거라는 다섯 가지 매운 채소를 쟁반에 담아 먹는다고 나온다. 그래서 이름을 다섯 매운 채소라는 뜻의 오신채(五辛菜) 혹은 오신채를 쟁반에 담았다는 의미에서 오신반(五辛盤)이라고 불렀다.

예전 봄이면 우리 어머니 할머니들이 들판에서 봄나물 캐듯 중국에서도 봄채소를 뜯어 먹다 이 무렵부터는 값비싼 향신 채소를 쟁반에 담아 먹었으니 봄채소 먹기가 상류층의 입춘 행사로 형식화, 고급화된 것으로 보인다.

입춘 오신채는 이후 한반도에서도 조선시대를 넘어 근대까지 봄철 풍속으로 자리잡았고 일본에서는 살짝 변형돼 입춘 대신 1월 7일 인일(人日)에 일곱 가지 봄채소로 칠초죽(七草粥)을 끓였다. 입춘 풍속이 동북아 전체로 퍼진 셈이다.

그런데 입춘에 왜 봄채소, 그것도 다섯 가지 매운 채소를 먹었을까?  

물론 봄채소가 봄나물보다 한달 쯤 빨리 나오기 때문이고 새봄이 왔으니 파릇파릇 신선한 채소로 봄기운도 느끼고 자극적인 맛으로 입맛을 돋우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연한 소리 이외에 보다 깊은 뜻도 있다. 진(晉)나라 『풍토기』에서는 입춘 오신채는 오장의 기운을 원활히 돌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풀이했다. 송나라 문헌 『무림구사』에도 매운 채소를 먹으면 살균이 되고 몸에 남은 추운 기운을 몰아낸다는 설명이 보인다.

얼핏 미사여구로 현학적 의미를 부여한 것 같지만 겨우내 묵은 음식만 먹다 신선한 채소로 비타민을 보충했으니 실제로 몸이 가뿐해짐을 느꼈을 수도 있다. 춘권에는 이렇게 봄의 활력을 불어 넣는 요소가 있었다.

또 다른 문화적 요소도 주목해 볼만 하다. 어쨌거나 송나라 이전까지 입춘 오신채는 쟁반에 담아 먹는 봄채소였을 뿐 밀전병에 말지는 않았으니 아직 춘권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송시대를 거치며 입춘 봄채소가 요리로 변신하는데, 바뀌기에 앞서 먼저 어마어마하게 고급화된다. 이 무렵 상류사회에서는 입춘 무렵 쟁반에 봄채소와 함께 과일, 엿 등을 담아 돌리는 풍습이 유행했다. 이를 봄 쟁반, 춘반(春盤)이라고 불렀다. 이 춘반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무림구사에는 “입춘이면 궁궐 후원에서 정교하게 춘반을 만들어 신하들에게 나눠주는데 그 값이 일만 냥을 넘는다”고 했을 정도다.

그러다 송나라 때 쟁반 대신 밀전병에 봄채소를 싸먹는 풍습이 생겼다. 밀전병의 등장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중국 역시 국수 먹으면 오래 산다는 속설을 만들어냈고 만두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을 정도로 밀가루 음식이 귀했던 시절을 거쳤기 때문이다. 밀전병에 싼 춘권은 그만큼 고급요리였다.

이어 원나라 때 요리책인 『거가필용』에 지금처럼 튀긴 춘권이 처음 보인다. 지금은 튀김요리가 별 것 아니지만 기름이 귀했던 옛날, 튀김은 경제적 풍요를 상징했다. 원나라에서 춘권이 또 한 차례 업그레이드 됐다.

상류사회의 입춘 고급요리였던 춘권이 대중적으로 퍼진 것은 청나라 무렵이다. 청나라 수도인 연경, 지금 베이징의 풍습을 기록한 『연경세시기』에 봄이 되면 부녀자들이 밀전병에 채소를 싸서 깨물어 먹는 풍습이 있다고 했는데 가진 자나 없는 자 모두 춘권을 먹는다고 했다.

봄을 돌돌 말아서 먹는다는 뜻의 이름, 춘권이 널리 퍼진 것도 이 때다. 시적 표현에서 새봄의 기운이 느껴지는 듯하다. 2월 4일이 입춘이다. 새봄이 시작되는 날이니 봄을 돌돌 말아 먹는 여유를 가져보는 것도 좋겠다.

윤덕노 음식문화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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