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 제자 성학대 교사 돌연 출소…스페인도 이 법에 발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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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서 지난해 10월 시행된 비동의 강간죄로 일부 성범죄자들이 감형, 조기 출소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사진은 스페인 여성들이 지난해 11월 국제 여성폭력 철폐의 날을 맞아 마드리드에서 거리 행진을 벌이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스페인에서 지난해 10월 시행된 비동의 강간죄로 일부 성범죄자들이 감형, 조기 출소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사진은 스페인 여성들이 지난해 11월 국제 여성폭력 철폐의 날을 맞아 마드리드에서 거리 행진을 벌이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영어 교사로 일했던 안토니오는 자신의 16~17세 동성 제자들과 그들의 친구에게 반복적인 성적 학대를 가했다. 거부하면 1200유로(약 160만원)를 건네며 회유했다.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그는 지난 2019년 마드리드 재판부가 미성년자 성매매와 성추행 등 위계에 의한 성학대 혐의로 징역 6년을 선고하면서 죗값을 치르는 듯했다.

그러나 안토니오는 복역한 지 3년째 되던 지난해 10월 돌연 조기 출소했다. 스페인에서 피해자의 '동의 의사'가 성폭행(강간) 처벌 기준이 되는 '비동의 강간법', 일명 '예스 민스 예스(Only yes means yes·동의해야 동의한 것)' 규정이 시행되면서다. 이 법으로 안토니오의 형량은 징역 15개월로 감형됐다. 어떻게 된 일일까.

스페인은 성범죄를 크게 성폭행과 성학대 두가지로 구분한다. 새 법의 핵심은 '동의 여부'다. 이 법은 명확한 동의 없이 이뤄지는 모든 성관계를 성폭행으로 간주한다. 그 전엔 형법상 폭력이나 협박, 강요가 수반돼야 성폭행으로 분류됐다. 그렇지 않으면 형량이 상대적으로 가벼운 성학대가 적용됐다. 새로운 법으로 피해자는 가해자의 폭력이나 협박으로 성관계에 이르게 됐다는 점을 더는 입증할 필요가 없어졌다. 법 제정을 주도한 스페인 양성평등부는 더욱 강력한 성범죄 처벌법이 등장했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법의 허점은 안토니오와 같이 특정 성학대 범죄에 대해 기존보다 더 가벼운 형량이 적용되면서 드러났다. 책임과 형벌 사이 비례성의 원칙(과잉조치 금지의 원칙)에 따라 성범죄의 최고 형량과 최소 형량 사이 갭이 더 커진 영향이다. 가령, 폭력을 동반한 집단성폭행은 기존보다 더 엄하게 처벌되기 때문에, 안토니오와 같이 강제성 없는 성학대 범죄는 비교적 가벼운 죄질로 분류돼 더 낮은 형량이 적용돼야 한다는 것이다. 안토니오의 경우 제자들이 성관계를 대가로 돈을 받은 게 동의 의사를 표한 것으로 간주됐다.

자칭 페미니스트인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사진)가 이끄는 사회당이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비동의 강간법을 개정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로이터=연합뉴스

자칭 페미니스트인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사진)가 이끄는 사회당이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비동의 강간법을 개정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로이터=연합뉴스

새 법의 결함이 드러나자 지난해 11월부터 스페인 여성단체들의 격렬한 항의 시위가 이어졌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가 이끄는 좌파 연립정부 내각에 대한 정치적 압박도 거세졌다. 결국 집권당인 사회당은 개정 카드로 사태 수습에 나섰다. 지난달 30일 필라 알레그리아 사회당 대변인은 기자회견에서 "법을 개정해 바람직하지 않은 효과를 해결하겠다"며 "성범죄자들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다뤄질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법 개정 과정은 순탄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연정 파트너인 급진 좌파 포데모스당이 "법 자체가 아니라 남성 우월주의에 빠진 법관의 해석이 문제"라며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포데모스당 소속인 이레네 몬테로 양성평등부 장관은 "이 법안은 지난 20년간의 페미니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진보 중 하나"라면서 "역사를 과거로 되돌리는 어떠한 개정안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야당은 제정법이 초래한 '국가적 망신'에 대한 책임으로 몬테로 장관의 사임을 요구 중이다.

비동의 강간법 제정을 주도한 급진 좌파 포데모스당 소속 이레네 몬테로 양성평등부 장관(사진)은 개정안에 "역사를 퇴행하는 조치"라고 반대했다. 사진은 지난 27일 젠더 폭력 관련 긴급 회의 이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몬테로 장관의 모습. AP=연합뉴스

비동의 강간법 제정을 주도한 급진 좌파 포데모스당 소속 이레네 몬테로 양성평등부 장관(사진)은 개정안에 "역사를 퇴행하는 조치"라고 반대했다. 사진은 지난 27일 젠더 폭력 관련 긴급 회의 이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몬테로 장관의 모습. AP=연합뉴스

앞서 2018년 6월 취임한 산체스 총리는 페미니스트 정부를 자처하며, 성폭행 사건의 처벌 모호성을 없애는 법안을 도입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하지만 파이낸셜타임스(FT)는 "올해 총선에서 재선을 노리는 산체스 총리에게 비동의 강간법은 골칫거리로 전락했다"고 평가했다. 카를로스 플로레스 스페인 공립 발렌시아대 헌법학 교수도 VOA에 "페미니스트 정부에서 페미니즘 관련 문제가 가장 크다. 현 정부는 주요 관심 분야에서 큰 실패를 봤다"고 지적했다.

스페인에선 앞서 2016년 18세 소녀가 5명의 남성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하며 제정 논의가 촉발됐다. 당시 1심 재판부는 "피해자의 '수동적'인 행동을 동의의 증거로 볼 수 있으며, 가해자들이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성학대 혐의를 적용했다. 이후 솜방망이 판결에 항의하는 스페인 시민 수만 명이 거리 시위를 벌이면서 더 강력한 성범죄 처벌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대법원은 결국 판결을 뒤집고 5명 모두에게 강간죄를 선고했다.

최근 한국에서도 여성가족부가 비동의 간음죄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했다가 법무부 반대로 철회하는 등 관심이 쏠리고 있다. 법무부는 "충분한 사회적 논의를 거치는 등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신중한 입장을 밝혔다. 국회에선 관련 법안이 법제사법위윈회에 계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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