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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사라진 미술시장, K작가 키워야 살아남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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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서울 국제갤러리 집무실에서 아니쉬 카푸어 작품 앞에 선 이현숙 회장. 국내외 아티스트 47명이 이 갤러리에 소속돼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서울 국제갤러리 집무실에서 아니쉬 카푸어 작품 앞에 선 이현숙 회장. 국내외 아티스트 47명이 이 갤러리에 소속돼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해 말 글로벌 미술전문지 ‘아트리뷰’ 선정 ‘파워 100’에 한국인 3명(이현숙·한병철·정도련)이 올랐다. ‘파워 100’은 세계 미술계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으로, 명단은 작가에서부터 미술관장, 화랑을 운영하는 갤러리스트, 큐레이터, 철학자·이론가까지 망라한다. 한국인으로 8년 연속 이 명단에 이름을 올린 인물은 국제갤러리 이현숙(73) 회장이 유일하다. 아트리뷰는 그에 대해 “국내외 미술계를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 양혜규 등 예술가들의 활약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단색화 명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지난해 한국 미술시장은 사상 처음으로 거래총액 1조원을 돌파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해외 갤러리들이 잇따라 서울에 지점을 열었고, 국내 작가들의 해외 전시가 이어지고 있다. ‘K-미술 시대’가 활짝 열렸다. 1982년에 문을 열고 지난 40년간 한국 미술 최전선을 지켜온 이 회장은 지금 미술계를 어떻게 볼까. 그를 만나봤다.

칼더재단의 제안으로 4월 6일부터 국제갤러리에서 칼더와 이우환 전시가 함께 열린다. 칼더의 ‘Black Beast’, 1940. Ken Adlard ©Calder Foundation. [사진 국제갤러리]

칼더재단의 제안으로 4월 6일부터 국제갤러리에서 칼더와 이우환 전시가 함께 열린다. 칼더의 ‘Black Beast’, 1940. Ken Adlard ©Calder Foundation. [사진 국제갤러리]

한국 미술시장이 큰 전환점을 맞았다.
“맞다. 전 세계가 이렇게 밀려 들어온 적이 없었다. 요즘엔 그냥 칼끝에 서 있는 것 같다. 바짝 긴장해야 한다. 적당히 해서는 안 된다. 한국미술을 키우기 위해선 어느 갤러리 하나의 힘으로는 절대 안 되고, 네댓 개 갤러리가 서로 경쟁하며 같이 움직여야 한다.”
처음엔 컬렉터였다가 갤러리를 차렸다고.
“말 그대로 내가 ‘선무당’이었다. 아이 셋을 키우며 살림하다가 화랑을 열었다. 젊을 땐 그림 사는 게 그렇게 좋았다. 어느 날 문득 내가 직접 팔아보고 싶어져 남편 몰래 화랑을 차렸다. 당시 모 일간지 미술 기자가 ‘저 유한마담이 몇 개월이나 할 수 있을까’라고 했다는데 여기까지 왔다.”
40년간 성장해온 비결이 뭘까.
“무엇보다 이 일을 하는 게 굉장히 즐거웠다. 이게 다른 장사와는 다르다. 작가를 몇 년간 지원하고, 시간이 걸려 그 작가가 큰 미술관에서 전시하게 됐을 때 느끼는 보람이 크다. 초기에 젊은 작가로 만난 이기봉(65), 홍승혜(63)작가가 지금은 중견이다. 칸디다 회퍼(78), 아니쉬 카푸어(68), 빌 비올라(72) 등 세계적인 작가들도 오랫동안 함께 해왔다.”

그는 “작품을 팔기 위해선 작가도, 고객도 잘 골라서 관계를 맺어야 한다”며 “갤러리가 작가를 키우려면 작품을 아무한테나 팔지 않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우환 화백. [사진 국제갤러리]

이우환 화백. [사진 국제갤러리]

고객을 고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작가와 작품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안 된다. 루이스 부르주아(1911~2010) 같은 거장도 생전에 작품가가 오르락내리락했다. 작가의 성장을 응원하며 기다려줘야 한다.”
과거엔 국내서 ‘그림 수집=탈세’로 통했다.
“그것도 오래된 이야기다. 우리는 초기부터 외국 작가들 작품을 많이 다뤘기 때문에 자료 없이 거래할 수가 없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아들이 현지 회계법인에서 일한 경력이 있어 일찍 투명한 거래 시스템을 갖췄다. 그 과정은 힘들었다. 고객들은 왜 이렇게 빡빡하게 구느냐고 했고, 작가들도 세금 내게 해서 힘들다고 했다. 그렇게 일해온 지 25년째다.”
요즘엔 해외 갤러리가 한국 작가 발굴에도 나서고 있다.
“한국 미술계가 살아남으려면 정말로 긴장해야 하는 이유다. 내 목표도 더 확고해졌다. 전에 우리가 외국 작가를 국내에 소개했다면 이젠 한국 작가를 키워서 밖으로 나가야 한다. 국내 갤러리라고 하더라도 작가를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면 작가가 붙어 있지도 않다. 미술시장에 국경이 없어지고 있다.”
‘K미술 시대’를 위해 작가들은 어떤 준비를 해야 하나.
“국내 작가 아카이브가 아직도 너무 약하다. 단색화를 해외에 소개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게 아카이브였다. 박서보 화백만 준비돼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가는 자기 작품에 대한 모든 기록을 갖고 있어야 한다. 드로잉도 중요하다. 작가가 크면 그게 다 초기 작품이다. 젊은 작가들은 지금 작품이 팔리지 않더라도 열심히 그리고 쌓아 놓아야 한다.”
젊은 컬렉터들이 늘고 있다. 초보 컬렉터에게 조언한다면.
“그림은 반드시 남아 있는 돈으로 사고 즐거움을 위해 사라. 돈 주고 사서 걸어놨으면 즐거워야 하지 않겠나. 절대 빚내서 사면 안 된다. ‘저게 돈이다’하고 보면 고통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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