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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라'가 줄인 출석 인정일, 탁구신동 '신유빈' 사태에 바뀐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탁구신동' 신유빈이 지난해 4월 27일 인천 서구 대한항공 탁구선수단 훈련장에서 열린 복귀 기자회견에서 훈련을 공개하고 있다. 뉴스1

'탁구신동' 신유빈이 지난해 4월 27일 인천 서구 대한항공 탁구선수단 훈련장에서 열린 복귀 기자회견에서 훈련을 공개하고 있다. 뉴스1

교육부와 문화체육관광부가 19일 초·중·고 학생 선수들의 출석 인정제 개선안을 발표했다. 학생 선수가 대회·훈련 등에 참가하기 위해 수업을 빠지는 경우, 출석으로 인정되는 기간을 대폭 확대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기준 출석 인정 일수는 초등학교 5일, 중학교 12일, 고등학교 25일이었다. 올해부터는 초등학교 20일, 중학교 35일, 고등학교 50일로 확대한다. 고등학생 선수의 경우, 2년 뒤인 2025년부터 63일(수업일수의 3분의 1)까지 늘린다는 목표도 세웠다.

출석 인정일 대폭 확대…‘정유라 사태’ 이전으로 돌린다

출석 인정 일수는 2019년 스포츠혁신위원회 권고에 따라 학생 선수들의 학습권을 보호하고 수업 결손을 막기 위해 매해 축소돼 왔다. 배경엔 이른바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건’의 시발점이 된 정유라씨의 부정 입학 사건이 있다. 정씨가 수업을 거의 듣지 않고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승마 체육특기자 전형으로 이화여대에 합격한 것이 발단이었다. 스포츠혁신위와 교육 당국은 학생 선수의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는 방향으로 권고안을 마련했다. 이에 2019년까지는 초·중·고 학생 선수 모두 63일까지 수업에 빠져도 됐지만, 혁신위 권고 이후인 2020년에는 초등학생 20일, 중학생 30일, 고등학생 40일로 대폭 줄었다. 혁신위 원안에 따르면 매해 점차 줄여 2024년에는 아예 출석 인정 일수가 ‘0일’로 사라질 계획이었다.

교육부·문체부 측은 출석 인정 일수가 과도하게 줄어 학생 선수들이 훈련에 참여하거나 국제대회에 출전하기 어려워지는 등 오히려 진로에 방해를 받는다는 비판을 수용했다고 이번 개선안의 취지를 설명했다. 훈련 시설이 멀리 떨어져 있는 조정이나 빙상 학생 선수들은 물론이고, 주말 대회 개최가 어려운 골프·테니스 학생 선수들도 현재 출석 인정 일수로는 훈련·시합 일정을 소화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교육부에 따르면 2021년 기준 골프 중학 선수 450명 중 출석 인정일수(15일)를 초과해 사용한 선수는 282명으로, 전체 선수의 62.7%에 달한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대회에 집중하기 위해 학교를 떠난 선수도 있다. ‘탁구신동’으로 불렸던 국가대표 신유빈 선수와 김나영 선수는 중학교 졸업 후 실업팀에 입단했다. 지난해 윔블던 테니스대회 14세부 남자 단식에서 우승했던 조세혁 선수는 중학교 졸업을 포기하고 검정고시를 준비 중이다. 17~19세 골프 선수 중 방송통신고등학교 등록생 비율도 2018년 135명에서 2022년 277명으로 두 배 이상 늘었다. 대회와 훈련 일정을 고려했을 때 학교 수업일수를 맞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 대한체육회 관계자는 “학생 선수는 상급학교, 프로팀 입단을 위해 대회 우승과 같은 운동 실적을 많이 쌓아야 한다”며 “혁신위 권고 취지도 이해하지만, 현실적으로 운동을 위한 출석 인정 기간이 더 늘어나는 게 학생 선수들을 위하는 것”이라고 했다.

“학생 선수 프로 진출 10%도 안 돼…‘인생 2막’ 학업 필수”

지난해 1월 22일 오후 강원 홍천종합체육관에서 열린 2022 KXO윈터리그& 무궁화배 전국 유소년 고교 농구클럽 최강전 시합 모습. 뉴스1

지난해 1월 22일 오후 강원 홍천종합체육관에서 열린 2022 KXO윈터리그& 무궁화배 전국 유소년 고교 농구클럽 최강전 시합 모습. 뉴스1

반론도 있다. 지난해 기준 초·중·고 학생 선수는 7만1391명이다. 초등학생 2만2282명, 중학생 2만7508명, 고등학생 2만1601명이다. 하지만 이 중 프로가 되는 학생은 10명 중 1명에도 못 미친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대한체육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평균 국내 운동선수 은퇴 나이는 23.6세였다. 은퇴 후 무직 비율은 41.9%에 달했다. ‘제2의 인생’을 위해서라도, 학생 선수의 학습권 보장이 매우 중요하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자녀가 초등학생 야구선수로 활동하고 있는 학부모 A씨는 “이번 정부의 개선안이 자칫 아이들과 감독·코치님에게 ‘공부보단 무조건 운동’이라는 시그널로 받아들여지진 않을지 걱정”이라고 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학생 선수로 활동했던 사람들도 학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고교 농구 에이스이면서도 3년간 전교 1등을 한 번도 안 놓친 것으로 유명한 이준호씨는 “선수 시절 공부를 놓지 않았기에 침체기가 오고 부상을 당해도 다양한 선택지를 가질 수 있었다”고 했다. 이씨는 2018년 서울대 체육교육과에 입학했고, 지금은 서울대 대학원으로 진학해 마케팅을 전공하고 있다. 그는 “프로에 입단하는 선배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오히려 훨씬 더 많았고 프로에 가서도 벤치만 지키다 그만두는 선수들도 많이 봤다”며 “중학교 때부터 학생 선수로 활동하며 그런 모습을 많이 봤기 때문에 예기치 못한 여러 상황에 대비하려면 공부를 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운동이든 학업이든, 선수 선택권 보장돼야”

고교 야구 선수 출신으로 지난해 서울대 체교과에 입학한 이서준 선수는 “출석 인정 일수가 늘어나는 것은 운동을 열심히 하려는 학생 선수들에게 긍정적인 방향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운동에 대한 강제성이 부과되진 않아야 할 것”이라며 “학생 선수 스스로 공부 또는 운동을 자신의 필요와 시기에 따라 선택해서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으면 한다”고 했다.

교육부는 이번 개선안이 학생 선수의 학업 소홀로 흘러가지 않게 하겠다는 방침을 분명히 했다. 체육특기자 대입 전형에서 학생부의 실질적 반영 비율을 30% 이상으로 높이도록 권고하고, 반영 비율에 따라 인센티브를 제공해 독려할 방침이다. 이 외에 교육부는 학생 선수의 수업 결손을 지원해주는 온라인 수업(e-school) 콘텐트를 확충하고, 방과 후 또는 주말 보충수업을 희망자를 대상으로 학습멘토단(대학생 튜터) 지원도 할 예정이다. 진로 상담을 위한 멘토 교사도 지난해 30명에서 2024년 100명까지 확대하기로 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대입에서 학생부 반영 비율을 높이는 것은 학업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며 “선수들의 체육 활동 지원뿐 아니라 학생으로서 학습권 보장도 함께 이뤄질 수 있도록 애쓸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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