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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모두를 위한 신호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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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경희 기자 중앙일보 P디렉터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자동차가 대중화하기 전에도 영국 런던의 도로는 마차와 보행자가 뒤엉켜 몸살을 앓았다. 1868년 세계 최초의 교통 신호등이 런던 국회의사당 등지에 설치됐다. 낮에는 신호기로 마차에 ‘진행’과 ‘멈춤’을 지시하고, 야간에는 빨강과 초록 가스등을 밝혀 신호를 보냈다. 1912년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 거리에 설치된 교통 신호기는 금속상자가 회전하면서 빨간색으로 쓴 ‘Stop(멈춤)’, 흰색으로 쓴 ‘Go(진행)’를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미국 뉴욕에선 1917년 신호등 도입 실험을 했는데 녹색을 멈춤, 빨강을 진행하라는 의미로 쓰며 혼란을 초래했다. 흔히 빨강이 위험을 나타내는 색이었기 때문이다. 1925년 관련법이 발효하면서 빨강이 ‘멈춤’, 녹색이 ‘진행’으로 정리됐다. 빨강-노랑-초록의 순서와 의미가 세계 공통의 약속이 된 건 1968년 ‘도로 표지판 및 신호에 관한 비엔나 협약’이 체결되면서다.

신호등은 안전을 위해 고안된 장치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겐 완전히 안전하진 않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의 등장인물 전재준과 같은 적록색약은 빨강과 초록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우리나라 남성의 약 5.9%, 여성의 0.4%가 색각이상자다. 색약은 색을 감지하는 세포 기능이 선천적·후천적으로 떨어져 발생한다. 이들은 신호등 색깔이 아니라 위치로 구분한다. 색약자용 특수 렌즈나 안경이 있지만 완벽하게 색을 보정해주는 건 아니다. 손상된 세포 기능을 유전자 치료로 되살리려는 연구도 진행되고 있지만, 기간이나 비용을 고려하면 갈 길이 멀다.

일본에서는 전체 신호등의 약 67%를 LED로 교체하면서 보행 신호의 배경색을 검정으로 바꿨다. 대신 걷거나 서 있는 사람을 각각 초록, 빨강으로 표시했다. 경찰청이 색각이상자·저시력자·노인 등을 대상으로 시각 인식 테스트를 해 가장 잘 보이는 안을 선택한 것이다. 서울시는 지난달 ‘산업재해 예방을 위한 서울 표준형 안전디자인’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금지는 빨간색 원형, 경고는 노란색 삼각형으로 표시하는 등 색깔과 모양을 연결해 디자인하는 식으로 색각이상자도 구분하기 쉽게 만들었다. 모두를 위한 ‘유니버설 디자인’이 각 분야에서 개발·적용돼 모두가 좀 더 안전한 사회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