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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학살, 인구 2000만명 줄었다…한족·회족 '둥간의 난' 비극 [채인택의 세계 속 중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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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족 사람들. 사진 셔터스톡

회족 사람들. 사진 셔터스톡

중국이 파키스탄의 과다르항 개발에 나선 데는 여러 가지 전략적 함의가 담겼다. 첫째, 세계 에너지 수송로의 목줄을 노리면서 중국 해군을 인도양까지 투사한다는 군사적인 목적이다. 둘째, 서부 신장위구르에서 파키스탄을 관통해 과다르로 이어지는 에너지 파이프라인을 건설해 중동에서 중국에 이르는 에너지 수송로를 크게 단축한다는 경제적 측면이다. 이는 동남아시아와 남중국해에 대한 과도한 안보 부담을 줄이는 효과도 있다.

셋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게 무슬림(이슬람 신자)이 다수 거주하는 신장위구르 지역에 대한 효과적인 경략과 관리다. 파이프라인으로 끌어온 원유를 정제하고 이를 바탕으로 에너지‧화학 시설을 신장위구르에 설치해 낙후된 지역의 경제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변방의 무슬림을 회유하고 끌어안을 여지를 확보할 수 있다. 이는 내정과 외정을 동시에 아우르는 비장의 책략이다.

사실 무슬림은 역대 중국 중앙정부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청나라(1636~1912년)는 중화 문명에 흡수되기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문화를 고집하는 몽골계와 무슬림 유목민을 통치하는 데 애를 먹었다. 청나라는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상대방도 큰 피해를 보았다.

몽골계 유목민인 오이라트 부족 연합체가 세운 준가르 제국(1637~1755년)은 오늘날 신장위구르 서부 대부분을 영유한 역사상 최후의 유목 제국이었다. 하지만 내분에 빠진 상태에서 청나라 건륭제(1735~1786년 재위)가 1755~1758년 만주군과 몽골군을 동원해 정벌에 나서면서 멸망했다. 그 뒤로도 청나라의 거듭된 잔당 색출‧토벌과 청군이 들여온 천연두로 준가르는 사실상 멸족했다. 일종의 종족 학살이나 다름없었다.

건륭제는 그 뒤 이 지역에 서역신강(西域新疆)이라는 이름의 번부(藩部‧청나라 때 간접 통치를 받거나 부족 자치를 허용한 비한족 거주지)를 설치했다. 몽골계는 물론 위구르족, 회족 등 다양한 무슬림계 민족을 포함한 유목민들이 함께 살았다.

청나라 말기에 들어서선 지금 중국의 서북부에서 대규모 무슬림 반란이 연이어 벌어졌다.

첫째, 1855~1873년 지금의 윈난(雲南)지역의 무슬림을 중심으로 ‘운남회란(雲南回亂)’이 터졌다. 

무슬림 지도자의 이름을 딴 ‘두문수(杜文秀‧1832~1872)의 난’, 패퇴한 회족이 도주해 정착한 미얀마 등에서 그들을 부르는 이름을 딴 ‘판세(Panthay)의 난’ 등으로 불린다. 주석 광산에서 회족과 한족 노동자들이 대립하던 중 청군이 와서 회족을 학살하면서 사태가 확대됐다. 운남회란으로 양측에서 각각 100만 명의 군대와 민간인이 숨진 것으로 전해진다.

둘째, 운남회란과 거의 동시인 1862~1877년, 지금의 산시(陝西)와 깐수(甘肅) 지역에선 둥간(東干)의 난이 터졌다. 

역대 무슬림 봉기로는 최대다. 둥간족을 중심으로 이 지역 회족, 위구르족 등 무슬림과 일부 한족이 봉기해 ‘둥간의 난’으로도 불린다. 동치제(1861~1875년) 연간에 시작돼 ‘동치회란(同治回亂)’으로도 불리지만, 지역과 시기를 모두 따서 동치섬감회란(同治陝甘回亂)이라는 용어도 쓴다.

둥간의 난은 학살 수준에서 다른 전란을 능가한다. 청나라에 따르면 회민(回民) 봉기 전인 1861년 이 지역의 인구는 깐수(甘肅)가 1945만 9000명, 산시(陝西)가 1394만 명이었는데 난리가 끝난 뒤인 1880년엔 깐수가 495만5000명, 산시가 772만으로 나타났다. 이는 깐수의 경우 전체 인구의 74.5%인 1455만 명이, 산시는 44.6%인 622만 명이 목숨을 잃거나 다른 지역으로 도주했음을 의미한다. 서북 신장에선 인구의 72.6%인 34만 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란이 얼마나 혹독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수치다. 2000만 명 이상의 주민이 죽거나 도주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전란 전에 400만 명이던 산시의 회족은 난리가 끝난 뒤 2만 명 수준으로 거의 절멸했다. 회족이 한족을. 한족이 회족을 인종학살 수준으로 서로 살해한 결과였다. 문화가 다른 상대를 서로 타자화해 인간 이하로 여기는 바람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셋째, 신장위구르에선 1862~1877년 ‘야쿠브 벡의 난’이 터졌다. 

이 무슬림 반란은 오늘날 산시(陝西)‧깐수(甘肅)‧닝샤(寧夏)회족자치구‧신장위구르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서 벌어졌다. 야쿠브 벡은 원래 중앙아시아 코칸트 한국(1709~1876년, 오늘날 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카자흐스탄의 일부) 출신 무장으로 신장위구르 지역으로 옮겨 활동했다. 코칸트 한국은 우즈벡족이 세운 이슬람 유목국가로 러시아에 정복됐다. 야쿠브 벡은 난이 진행 중이던 1867년 카슈가르에서 아미르(이슬람 군주)로 즉위했다.

야쿠브 벡은 파미르 고원 초입의 무슬림 도시 카슈가르(중국어로 카스, 喀什)를 수도로 하고 위구르어와 우즈벡어를 공용어로 삼은 유목사회의 무슬림 다민족 공동체를 형성해 청나라에 대항했다.

주목할 점은 카슈가르가 중국 일대일로 구상에선 파키스탄 남부 과다르에서 시작한 파이프라인이 파키스탄을 관통해 최종적으로 이어지는 지점으로 상정됐다는 사실이다. 카슈가르 지구는 신장위구르에서 위구르족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드문 도시라는 점도 중요하다. 2017년 통계로 전체 인구 464만 9700명 중에서 위구르족이 429만 5200명(92%), 한족이 28만 8000명(6.1%)으로 나타났다.

예로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구도인 우무루치(烏魯木齊)는 2020년 센서스에서 인구가 405만 4000명으로 나타났으며 이중 한족이 76%, 위구르족이 11%, 회족이 9%로 나타났다. 이름은 ‘아름다운 목장’이란 뜻의 몽골 오이라트 방언이지만 인구로 보면 한족 우위의 도시다. 신장위구르 전체로 보면 위구르족 47%, 한족 39%, 카자흐족 7%, 회족 5%를 차지한다. 카자흐족, 몽골족, 둥샹족, 타지크족, 시버족 등이 각각 1% 이하의 비율이다.

야쿠브 벡은 카슈가르에 러시아가 이 지역으로 남하하는 것을 저지하려는 영국을 끌어들여 1874년 영사관을 유치했다. 야쿠브 벡 통치 지역의 서남쪽은 당시 영국령이던 인도였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1947년 인도 독립과 함께 분할된 오늘날 파키스탄의 북부다.

청나라는 태평천국의 난(1850~1964년) 진압에서 군공을 세운 좌종당(左宗棠‧1812~1885년)을 흠차대신으로 임명해 반란 진압을 맡겼다. 반란은 1877년 5월 야쿠브 벡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도 지속해 좌종당은 1878년에야 최종 평정할 수 있었다. 좌종당은 신장위구르 지역을 다시 청나라의 강역으로 돌려놨다. 그 과정에서 인명 피해는 엄청났다. 양측을 합쳐서 800만~1200만 명의 사망자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야말로 피바다다.

앞으로 과다르를 통해 인도양과 이어지는 신장위구르의 역사를 잠시 짚어보자. 중국 서북부의 톈산산맥 남쪽에 살던 튀르크계 유목민 회홀(回紇)인들은 원래 불교도였지만 언제부터인가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중국에선 이슬람교를 회홀인이 믿는 종교라고 해서 ‘회교’라고 불렀다고 한다. 회홀인은 13세기 이후 위구르인으로 불렸다. 한자로 유오이(維吾爾)라고 쓴다. 중국에선 회민이라고도 불렀다. 이들이 사는 지역을 회부라고 했는데, 지금의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에 해당한다.

이 지역은 당나라가 일부를 일시 지배하다 8세기에 티베트가 점령하면서 중국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 뒤 장장 1000년 뒤인 1759년 만주족의 청나라가 이 지역을 지배하면서 다시 중국의 일부가 됐다. 그 뒤 태평천국의 난으로 중앙정부의 힘이 빠져 변방에 신경을 쓰지 못하자 현지 위구르 인들이 1862년 봉기해 1864년 만주족 관리들을 내쫓고 독립 정권을 세웠다. 야쿠브 벡의 난은 이렇게 시작됐다.

중국 역사학자 바이양(柏楊)에 따르면 당시 세금 징수원이던 위구르족 마금·마팔이 혹독하게 굴자 한인들이 들고일어났다. 그러자 마금·마팔은 적반하장격으로 ‘한족들이 계획적으로 이슬람교도들을 말살하려 든다’고 주장하면서 무력항쟁을 촉구했다. 이 때문에 유혈사태가 발생해 혼란스러워지자 그 틈을 타서 현지인 관리가 독립정권을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곧 권력 투쟁이 벌어져 이웃 코칸트 한국에서 건너온 우즈베키스탄계 무장 야쿠브 벡이 정권을 잡았다. 그는 당시 중앙아시아의 지배권을 놓고 싸움을 벌이던 영국과 러시아의 힘을 이용하려고 했다. 1872년 러시아, 1874년 영국의 승인을 받았다.

야쿠브 벡은 계책을 하나 냈다. 당시 이슬람 세계와 튀르크계의 종주국이던 오스만 튀르크 제국(1299~1922년)에 사절을 보내 나라를 바치겠다고 한 것이다. 수천㎞ 떨어진 오스만 제국의 형식적 속국이 되어 외교·재정 지원을 받으면서 왕권을 유지하려는 노림수였다. 오스만의 술탄(정교일치의 이슬람 군주) 압뒬라지즈(재위 1861~1876년)는 야쿠브 벡을 신하로 받아들이고 아미르(이슬람 군주)라는 호칭을 하사했다. 사절은 대포와 총, 그리고 황금과 은덩이를 받아 돌아갔다. 1873년의 일이다.

그동안 청나라 정부는 양분됐다. 해양의 방어가 급하니 독립을 인정하고 조공이나 받자는 해방파(海防派)와 변방부터 철저히 지켜야 한다는 새방파(塞防派로) 나뉘었다. 당연히 해방파는 친러 색채를, 새방파는 친미‧친영의 분위기였다. 오늘날에도 교훈을 줄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결국 새방파의 지도자 좌종당이 정벌에 나서 주요 거점인 우루무치를 점령했다. 야쿠브 벡의 독립을 요구하는 영국의 요구 앞에 좌종당은 “영국이 그토록 그들을 아낀다면 왜 인도를 그들에게 떼어주지 않는가”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영국은 등을 돌렸다. 홍콩에 거점을 둔 보스턴은행을 통해 군자금을 대출해 주면서 청나라를 지원했다. 힘의 공백을 이용해 자칫 러시아가 신장을 차지할까 봐 차라리 중국을 지원한 것이다.

결국 신장위구르는 1884년 11월 다시 중국의 손에 들어갔다. 러시아는 그 기회를 틈타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 전역을 합병했다. 결국 야쿠브 벡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그 뒤 그의 아들들은 권력을 놓고 골육상쟁을 벌이다 청나라 군대 앞에 자멸했다. 위구르 독립정권은 이용하려던 외세의 배신과 권력자들의 내분 속에서 짧게 끝났지만 그 여진은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다.

채인택 국제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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