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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함 꿈꿨던 소녀무당의 성장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11일 개봉한 박혁지 감독의 ‘시간을 꿈꾸는 소녀’는 무녀가 될 운명을 타고 났지만 자신의 미래를 바꾸고 싶은 소녀 ‘수진’의 이야기를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다. [사진 영화사 진진]

11일 개봉한 박혁지 감독의 ‘시간을 꿈꾸는 소녀’는 무녀가 될 운명을 타고 났지만 자신의 미래를 바꾸고 싶은 소녀 ‘수진’의 이야기를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다. [사진 영화사 진진]

평일엔 평범한 대학생이지만, 주말엔 충남 홍성의 무당으로 점을 보고 굿을 했다. 올해 스물여섯 권수진 씨는 한국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16학번이다. 3년 전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서울 자취방과 홍성의 심심산골 신당을 오가는 이중생활을 했다.

첫돌에 부모가 이혼해 할머니 손에 자란 권씨가 4살에 처음 신통력을 보였을 때 할머니는 하늘이 내려앉는 줄 알았단다. 손녀의 운명을 바꿔보려 했지만 권씨는 6살 되던 해 결국 신내림을 받게 됐다. SBS ‘진실게임’, KBS ‘성장다큐-꿈’, OBS ‘멜로다큐 가족’ 등 방송에 소개되며 ‘꼬마무당’이란 별명도 얻었다.

무당 팔자에 또 다른 꿈이 싹텄다. 권씨는 초·중·고등학교 내내 반장 자리를 놓지 않고 공부하며 광고기획자를 꿈꿨다. 무당의 길을 뒤로 한 채 광고·방송 일을 하며 사회에 섞여 살길 바랐다. 그러나 대학 합격 후 홀로 상경해 정체를 감추고 버텨온 캠퍼스 생활은 1년도 안 돼 그를 선택의 기로에 서게 했다.

“홍성에선 어딜 가도 ‘산속에 사는 수진이구나’ 다 알아봤어요. 대학에 가선 제 사정을 설명하고 이해시켜야 하는 순간이 많았죠. 1학년 1학기 때 과 대표를 하면서 대학 생활, 인간관계가 뜻과 다르게 어긋나면서 힘들어졌죠.”

권수진(左), 박혁지 감독(右)

권수진(左), 박혁지 감독(右)

9일 서울 가회동 카페에서 만난 권씨는 “원망도 미움도 아쉬움도 없다. 어쩌면 신이 나에게 굴복할 계기를 만들어준 게 아닐까”라고 말했다. 그가 고3 수험생이던 2015년부터 지난해 2월까지 7년간 치열하게 거쳐온 삶의 갈림길을 비춘 다큐멘터리 ‘시간을 꿈꾸는 소녀(이하 시꿈소)’가 11일 개봉한다.

다큐는 지난해 세계 최고 권위의 다큐 영화제인 암스테르담 국제다큐영화제(IDFA) 국제경쟁부문 13편 중 한편에 선정돼 “영적인 존재와 현대 한국의 삶을 결합하려 노력하는 젊은 여성의 고군분투기”로 주목 받았다.

‘시꿈소’는 한 남편을 둔 두 할머니의 한지붕 살이를 그린 다큐 ‘춘희막이’(2015), 거리의 아이들을 품은 신부의 발자취를 담은 ‘오 마이 파파’(2016) 등을 만든 박혁지(51) 감독의 네 번째 장편 다큐다. “답을 내리기 어려운 삶을 찍게 된다”고 말한 박 감독은 “무속에 관한 다큐가 아니라 한 소녀의 특별한 성장 과정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어릴 때부터 이 직업에 감사했던 적은 한 번도 없어요. 학교 갔다가 친구와 학원도 가고 싶은데 학원 차가 산속에 못 와서 가지 못했죠. 늘 (점을 보려는) 손님들이 저를 기다려서 제 시간이 없었죠. 그럼에도 제 능력이 감사한 순간은 나를 통해 나아지는 사람, 좋아지는 사람을 보고 보람을 느낄 때죠.”

권씨는 “절실하면 정치인, 기독교 신자도 찾아온다. 요즘은 동성애 자녀를 둔 부모가 자식 사주에 이성 연인은 없는지 물어보러 온다”면서 무당을 “가운 입지 않은 의사”라고 표현했다.

“대학생으로 돌아가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은? 너무 애쓰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애써도 안되는 것들이 있잖아요. 인생에서 내 잘못만이 아닌 것도 많고요. 저뿐 아니라 우리 모두 너무 자신을 탓하면서 좌절하지 말고, 생각지 못한 곳에 좋은 해답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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