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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세컷칼럼

공기업 낙하산, 그 끝없는 기득권 파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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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곤 기자 중앙일보 편집인

고현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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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에 입사하려면 한국사·국어·IT 등 각종 자격증을 따야 한다. 가산점을 얻기 위해서다. 학원비, 교재비, 응시료,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겨우 스펙을 갖춰도 수백 대 1 경쟁을 뚫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면접은 고사하고, 1차 관문인 서류 전형에서 대부분 탈락한다. 운 좋게(?) 붙어도 금세 자신의 처지를 깨닫는다. 열심히 일해도 '사원에서 사장까지' 이런 꿈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사장은 정치인·관료…적자 내도 멀쩡 #청년들, '사원에서 사장' 꿈도 못 꿔 #역대 정부 이어 윤 정부도 낙하산 #새해 '공정과 상식' 지켜질지 볼 것

공기업 사장이 되려면 정부부처를 거쳐야 한다. 더 쉬운 방법은 정치권이나 권력의 언저리에서 맴돌다가 자리를 꿰차는 것이다. 이들은 전문성이 없고, 마음은 늘 콩밭에 가 있다. 기회만 닿으면 공기업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정치판으로 달려간다. 어차피 오래 있을 회사도 아니고, 내 돈도 아닌데 직원들과 마찰을 빚을 이유가 없다. 노조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으로 적당히 타협한다. '공공기관 운영 법률'을 적용받는 350개 공기업의 한 해 예산은 761조원이다. 위험천만한 낙하산 기관장이 국가 예산(올해 638조원)보다 많은 돈을 굴린다. 경영이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다. 공기업 순이익은 2016년부터 2021년까지 5조원 줄었다. 부채는 같은 기간 493조원에서 583조원으로 늘었다.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 몫이다. 지난해 정부가 공기업에 지원한 세금만 109조원이다.

정부가 매년 경영실적을 평가해 등급을 매기지만, 공기업 기관장은 꿈쩍도 안 한다. 솜방망이 처벌에다 '블랙리스트' 방탄까지 둘렀다. 지난해 경영실적이 나빠 해임을 권고받은 기관장은 해양교통안전공단 딱 한 곳이었다. 실적 부진으로 경고를 받은 기관장도 토지주택공사 등 3곳에 불과했다. 적자를 내도 자리를 지킨다. 심지어 성과급도 받는다. 민간에선 어림없는 일이다. 이삼걸 강원랜드 사장, 김경욱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 원경환 대한석탄공사 사장은 2020년 총선에서 떨어진 후 이듬해 사장 자리를 꿰찼다. 꿩 대신 닭. 이들 3사는 2021년 적자를 냈다.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역대 정부는 공기업을 전리품으로 여겼다. 챙겨줄 사람 넣어주고, 적당히 빼먹고. '욕하면서 배운다'고 보수·진보 정부 모두 똑같았다. 국민을 우습게 여긴 것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공기업 낙하산과 보은 인사는 없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취임사에서 "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했다. 하지만 낙하산 인사가 역대 어느 정부보다 많았다. 지난해 임기 막판까지 정기환 마사회장(문 정부 정책기획위원), 윤형중 한국공항공사 사장(국가정보원 1차장), 김제남 원자력안전재단 이사장(시민사회수석)을 내리꽂을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때 "공공기관 낙하산을 원천 차단하겠다"고 공약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공기업 파티는 끝났다"고 호기롭게 말했다. 정권 초에 독한 마음 먹고 낙하산 악순환을 끊지 않는 한 공염불이다. 정치권과 정부, 노조가 나눠 먹는 오랜 이권 카르텔을 깨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약탈 정치는 좌우의 문제가 아니라 반세기 넘게 누적돼온 경제발전과 삶의 방식에 녹아있다.'(강준만 『권력은 사람의 뇌를 바꾼다』) 지금까진 새 정부도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빈자리가 나오자 낙하산 인사로 채웠다. 윤 대통령이 정치한 지 얼마 안 돼 챙겨줄 사람이 많지 않다고 떠들었던 평론가들만 머쓱해졌다.

지난해 말 취임한 최연혜 가스공사 사장은 윤석열 대선 캠프에서 활동했다. 1차 공모에서 에너지를 잘 몰라 탈락했으나 결국 사장에 올랐다. 세계는 에너지 위기다. 중차대한 시기에 에너지 문외한이 석연치 않은 과정을 거쳐 가스공사 사장을 맡았다. 그는 2012년 총선 때도 대전에서 낙선한 뒤 이듬해 코레일 사장을 꿰찼다. 당시 "다음 총선에 출마하지 않고 임기 3년간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으나 중도 하차하고, 비례대표로 국회에 들어갔다. 정용기 지역난방공사 사장은 국회의원·구청장을 지냈다. 에너지와 관련이 없다. 윤석열 대선 캠프 정무특보로 합류했다가 지난해 대전시장 당내 경선에서 떨어졌다. 다시 반년 만에 지역난방공사 사장이 됐다. 길에서 컵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노량진 학원을 전전하는 청년들은 이걸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이런 식으로 '공기업 파티'를 끝낼 수 있을까.

올해와 내년, 문재인 정부 기관장의 임기가 속속 만료된다. 당장 새해 초 주택도시보증공사와 예탁결제원 사장 자리가 빈다. 선거 캠프 출신, 전직 관료 등 낙하산 하마평이 무성하다. 공기업 외에도 정부 영향력 아래 '짭짤한' 자리가 부지기수다. 건설·금융과 무관한 이은재 전 의원이 취임해 논란을 빚은 전문건설공제조합 이사장 같은 자리다. 내년 4월 총선을 노리고 그만두는 사람, 낙선 뒤 자리를 기웃거리는 사람이 얽히고설킨다. 한바탕 난장판이 될 게 틀림없다. 공기업이 망가지든 말든 이들의 관심은 출세와 주머니를 채우는 것이다. 이들이 바로 기득권이다. 국민은 윤석열 정부의 '공정과 상식'을 지켜보고 있다. '내로남불의 끝판왕' 문재인 정부와 얼마나 다른지도 따져볼 것이다. "기득권에 매몰된 나라에는 미래가 없다"는 윤 대통령 2023년 신년사가 빈말이 아니었으면 한다.

글=고현곤 중앙일보 편집인 그림=김은송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