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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단 'ㅎㄱㅎ' 6·1 지선 개입 의혹…"김정은 호칭은 총회장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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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국가정보원 전경. 사진 국가정보원 제공

국가정보원 전경. 사진 국가정보원 제공

북한이 노동당 직속의 대남 간첩공작기구인 '문화교류국'과 연계된 제주 지하조직 'ㅎㄱㅎ'을 앞세워 지난해 6·1 지방선거에 개입했을 정황을 놓고 국가정보원과 경찰이 수사 중이다. 안보 수사당국은 'ㅎㄱㅎ'이 '한길회'의 초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각에선 이번 사건이 제2의 '일심회' 사건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일심회는 노무현 정부 당시 북한이 국내 정치권의 86(1980년대 학번 60년대 출생) 세대와 운동권 출신에 침투하려 했던 간첩 조직이다.

9일 중앙일보의 취재를 종합하면 안보수사 당국은 국내 진보정당 출신 A씨 등이 지난해 3월 북한 문화교류국의 지령을 받고 민주노총 4·3통일위원회 등 진보운동 단체들을 모아 진보정당 후보를 밀어주기 위한 다양한 형태의 지지선언 운동을 벌이려 한 혐의를 확인 중이다. 북한이 석 달 후 지자체 선거에 개입하려던 정황을 당국이 분석 중이라고 복수의 정부 소식통이 전했다.

북한 문화교류국은 노동당 직속 대남 공작 조직으로 1992년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1994년 구국전위, 1999년 민족민주혁명당, 2006년 일심회, 2011년 왕재산 등 각종 공안 사건에 개입했다.

당국은 이번에 드러난 'ㅎㄱㅎ'의 지하조직이 제주 지역뿐 아니라 전국에 걸쳐 결성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수사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당국은 지난해 11월과 12월 서울과 제주는 물론 창원·경남 진주·전북 전주 등에서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총책으로 지목된 A씨는 2017년 7월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서 북한 문화교류국 소속 공작원인 김모씨와 접선한 것으로 당국은 의심하고 있다. 그는 북한 공작원 김씨로부터 암호프로그램 사용법에 대한 간첩 통신교육을 받고 암호 장비를 받은 뒤 귀국했다.

이후 A씨는 북한 문화교류국의 지령에 따라 제주지역 노동운동 간부인 B씨와 농민운동 간부 C씨 등 2명을 포섭해 제주지역 지하조직인 'ㅎㄱㅎ'을 결성했다고 당국은 보고 있다. 이들은 현재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 구성·가입, 간첩·회합통신, 찬양·고무·선전 등의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수사당국은 'ㅎㄱㅎ'의 의미에 대해서도 조사 중이다. 대남 공작원 출신 고위탈북자는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조직명은 북한과 소통하며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해 만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지난해 9월 'ㅎㄱㅎ' 산하의 노동부문 조직명이 '한길회'로 지어졌다. 당국이 포착한 'ㅎㄱㅎ'의 지난해 10월 북한 보고 내용에 따르면 한길회는 '조국통일의 한길을 가겠다'는 뜻이다.

한 소식통은 "A씨 등이 'ㅎㄱㅎ'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지만, 한길회를 뜻하는 것으로 당국이 보고 있다"고 귀띔했다.

북한 문화교류국은 'ㅎㄱㅎ'에 반윤석열·반보수·반정부·반미 투쟁 방침에 대해 구체적인 지침을 내리면서 불법 집회와 시위를 열라고 지시했다는 게 당국의 판단이다. 이에 따라 'ㅎㄱㅎ'은 2022년 8월 한·미 연합 군사훈련 반대 시위를 진행했고, 같은해 11월 윤석열 정부의 퇴진을 주장하는 제주 현지 단체의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는 것이다. 또 지난해 9월 국내 진보정당의 지도부 선출 동향과 함께 윤석열 정부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 집회의 준비 상황 등을 북한에 보고한 혐의도 받고 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수사 당국에 따르면 이들은 추적을 피하기 위해 북한과의 교신에선 'ㅎㄱㅎ'은 '대학원'으로, 조직원은 '대학원생'으로 호칭했으며,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총회장님', 상부조직인 문화교류국을 '연구원', 해외여행을 '쇼핑'으로 각각 불렀다.

해외에서 북한 공작원을 접선할 때는 회피 수법으로 미행을 따돌리려 했고, 조직원간 접선은 외부와 차단된 아지트에서 휴대전화 전원을 꺼놓은 상태에서 했다. 또 북한 문화교류국과는 외국계 e메일과 사이버드보크(클라우드)로 교신하면서 정기적으로 서버를 바꿨고, 북한 문화교류국이 개발한 암호프로그램(스테가노그래피)로 보안을 철저히 했다고 당국은 파악했다.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은 "'ㅎㄱㅎ'은 조직이 노출됐을 때 피해를 막고, 비밀 누설을 방지하기 위해 조직원 상호 간에 1대1 종적 연계만 유지하는 단선연계(單線連繫)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며 "북한은 공작 임무를 지속하기 위해 2개 이상의 조직을 배치하는 복선포치(複線布置) 전략도 사용하기 때문에 추가 조직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ㅎㅅㅎ' 사건은 2006년 10월 당시 북한이 민주노동당 등 정치권의 86세대와 운동권 출신을 포섭한 '일심회' 사건과 유사하다는 지적이다. 해외에서 북한 공작원과 접선한 뒤 지하조직을 만들고, 북한과 교신을 주고받으면서 지령을 수행했다는 점에서다. 당시 김승규 국정원장은 수사 도중 물러났다는 사실이 폭로 전문 웹사이트인 위키리크스에 의해 공개됐다.

수사를 받는 당사자들은 정치적 탄압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이들은 압수수색 직후 논평을 통해 "전형적인 정권위기 탈출용 공안사건 조작"이라며 "이런 구시대적인 발상으로 이태원 참사, 경제위기, 한반도 평화위기 등 윤석열 정권이 자초하고 있는 일련의 사태의 책임을 결코 면할 수 없다"고 밝혔다.민주노총도 이날 성명을 내고 "민주노총제주본부는 제주지역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결사체로서 조합원의 민주적인 의사결정에 따라 행동하는 조직"이라며 "일부 세력의 지령이나 사주를 받아 움직이는 조직이 결코 아니며 그렇게 운영될 수도 없다"고 반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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