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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영화 만들자” 강수연·안성기 캐스팅, 메가폰 잡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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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1호 26면

[김동호 남기고 싶은 이야기] 타이거 사람들 〈24〉 영화감독 데뷔

필자는 2012년 단편 ‘주리’로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주리’를 모니터링 하고 있는 필자(가운데). [사진 김동호]

필자는 2012년 단편 ‘주리’로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주리’를 모니터링 하고 있는 필자(가운데). [사진 김동호]

나는 30년의 공직생활에 이어 30년의 영화인생을 살고 있다. 후회 없는 삶이라고 자부한다.

영화진흥공사에서 4년간 영화계와 동화했고, 부산국제영화제를 창설해 15년을 집행위원장으로, 6년을 명예집행위원장으로, 다시 2년을 이사장으로 전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심사위원을 50여 차례나 맡으면서 지금도 돌아다니고 있다.

법학을 전공했음에도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연구교수(2000~2005)로 석·박사과정 제자들과 영화정책에 관한 세 권의 책을 저술했고, 특히 2012년 단국대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을 창설해 대학원장으로 5년간 재직했다. 특히 주식회사 타이거시네마를 세워 롯데엔터테인먼트에서 4년간 매년 4억원의 협찬을 받아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 학생들의 장편 졸업영화 제작을 지원했으니 영화제작자(프로듀서) 경험도 축적했다.   2015년 11월 제9회 아시아태평양영화상 심사위원장을 맡았을 때 카탈로그에 ‘배우, 감독, 프로듀서 및 부산국제영화제 창설자’로 소개됐다.

75세였던 2012년 단편이지만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2011년 말 안성기 아시아나 국제단편영화제(2021년부터 광화문 국제단편영화제로 개명) 집행위원장으로부터 다음해 개최되는 제10회 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영화심사 과정을 담은’ 영화를 연출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개막작이라고 해서 부담을 느꼈지만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을 여러 차례 지낸 경험을 녹여 만든다면 가능할 것 같아 수락했다.

임권택 “전 세계 영화제 휘젓고 다니더니…”

‘주리’의 한 장면. 오른쪽부터 강수연, 토미야마, 박희본, 정인기, 토니 레인스. [사진 김동호]

‘주리’의 한 장면. 오른쪽부터 강수연, 토미야마, 박희본, 정인기, 토니 레인스. [사진 김동호]

발단은 제9회 아시아나 국제단편영화제(2011년 11월 2~7일)였다. 심사과정에서 심사위원인 배창호 감독과 장률 감독 사이에 의견이 충돌했는데 영화제가 끝난 뒤 평가회의에서 ‘심사과정’을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고 한다. 시나리오는 장률 감독이 쓰되 연출은 나에게 맡기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고 했다.

2012년 1월 16일 아시아나 국제단편영화제(ASIFF) 개막작 제작을 위한 제1차 회의가 광화문의 ASIFF영화제 사무실에서 열렸다. 집행위원장인 안성기, 집행위원인 김용연 금호문화재단 부사장과 이춘연 시네 2000 대표, 홍효숙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정범 ASIFF사무국장과 이주연 프로그래머 그리고 연출을 맡은 내가 참석해 가칭 ‘결정’(최종적으로 ‘주리’로 결정) 제작회의가 열렸다. 장률 감독의 시나리오와 함께 예산안, 제작진과 출연진 등을 검토하면서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총괄프로듀서에 제2회부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14년간 함께 일해 온 홍효숙 프로그래머, 조감독으로는 ‘여고괴담 2’로 데뷔하고 탕웨이(湯唯) 주연의 ‘만추’를 연출한 김태용 감독을 선임했다.

영화 ‘주리’ 포스터.

영화 ‘주리’ 포스터.

장률 감독의 시나리오는 작품성 위주로 썼기에 좀 어려웠다. 나는 작품성보다는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 비교적 젊은 윤성호 감독에게 각색을 부탁한 뒤 토론을 거쳐 새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영화는 다섯 명의 국제영화제 심사위원들이 두 편의 영화를 대상으로 심사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논쟁과 격렬한 몸싸움’을 담았다.

나는 각본에 적합한 배우를 선정하기 위해 고심한 결과 강성 심사위원으로 강수연 배우를, 이에 맞서는 젊은 감독 역할에 정인기 배우를, 두 심사위원 틈에서 쉽게 판단을 못 내리는 ‘우유부단한’ 심사위원장 역할에 안성기 배우를 각각 캐스팅했다. 영어를 잘 못해 고심하는 심사위원 역할은 평소 잘 알고 지낸 일본의 독립영화전용관 이미지포럼의 토미야마 가쓰에 사장에게, 또 한 사람의 외국심사위원 역할은 오랜 친구인 영국의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스에게 각각 부탁해 승낙을 받았다.

배우 박희본이 심사위원 담당 프로그래머로, 박정범 감독과 배우 이채은을 영화 속의 감독으로, 양익준 감독은 영화 속의 배우로 캐스팅했고, 엣나인영화사의 주희 이사, 배우 김꽃비를 사회자와 질문자로 정했다. 마침 후반작업을 위해 서울에 온 이란의 거장 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 부부와 임권택 감독 부부, 연극배우 손숙이 특별 출연했다.

‘주리’ 촬영 후 배우, 스태프들과 함께. 앞줄 왼쪽 넷째가 필자. [사진 김동호]

‘주리’ 촬영 후 배우, 스태프들과 함께. 앞줄 왼쪽 넷째가 필자. [사진 김동호]

‘박하사탕’ ‘살인의 추억’ 등을 찍은 김형구 감독에게 촬영을 부탁했고, 조명은 정영민 기사에게 의뢰했다. 편집은 ‘실미도’의 강우석 감독과 고임표 기사가, 음악은 ‘라디오 스타’의 방준석이 각각 맡았다. 대작 장편영화에 못지않은 화려한 출연 및 제작진이 꾸려졌고 모두가 ‘재능기부’로 제작에 흔쾌히 참여했다.

7월 8일 모든 스태프와 배우가 광화문 금호아시아나 본관에서 최종점검을 했다. 7월 9일부터 사흘간 광화문에 있던 인디스페이스극장과 평창동의 크리스천 아카데미, 덕수궁 돌담길, 경희궁에서 촬영을 마쳤다. 나는 배우들에게 대본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말하도록 부탁하고 가능한 한 본인들의 원래 성격이 그대로 표출되도록 유도했다.

그 후 편집, 기술시사 등을 거친 뒤 11월 1일 제10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개막식에서 상영했다. 다행스럽게도 반응이 좋아 마음이 놓였다.

영화 ‘주리’는 그 뒤 12월 1일 개막한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상영됐으며 이듬해인 2013년 제63회 베를린영화제(2월 7~17일) 파노라마 부문에 공식 초청됐다. 나는 ‘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아닌 감독’으로서 무대에 올라 관객의 질문공세를 받았다. 그 뒤 영화감독으로서 삿포로 국제단편영화제를 비롯하여 많은 영화제에 초청받았다.

거장 영화에 등장, 잊을 수 없는 추억·행운

필자가 배우로 출연한 영화 ‘정사’ 속 한 장면. 왼쪽부터 이영란, 필자, 송영창. [사진 김동호]

필자가 배우로 출연한 영화 ‘정사’ 속 한 장면. 왼쪽부터 이영란, 필자, 송영창. [사진 김동호]

그해 10월에 열린 제18회 부산국제영화제(2013년 10월 3~12일)에선 모흐셴 마프말바프 감독이 제작한 나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와 함께 ‘주리’가 상영됐고, 관객과의 대화가 진행됐다. 500석을 꽉 메운 극장에서 영화상영이 끝난 뒤 관객과의 대화가 시작되자 객석에 있던 임권택 감독이 맨 먼저 손을 들었다. “전 세계 영화제를 휘젓고 다니더니 영화 찍는 것이 쉬운 줄 알고 덤벼들었느냐”고 묻자 폭소가 터졌다. 나는 즉석에서 “89년 이후 20여년간 임 감독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100편이나 영화를 찍는 것을 보고 아무나 쉽게 영화를 만드는 줄 알고 연출했는데 찍어보니 역시 임 감독께서 고수였음을 알게 됐다”고 응답해 폭소가 터졌다.

나는 ‘배우’로서도 몇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98년 5월 말, 봄 영화사의 오정완 대표가 촬영 중인 영화 ‘정사’에 출연해 달라는 제안을 했다. 이재용 감독이 연출하고 이미숙, 이정재가 주연인 영화였다. 호기심이 발동해 지자체장 선거일인 6월 4일 청담동으로 가서 건축회사 회장 역할로 배우 이영란·송영창과 함께 대사 있는 단역으로 촬영했다. 영화는 그해 10월 3일 개봉됐다.

2004년 초 프랑스의 클레어 드니 감독으로부터 영화 ‘개입자(Intruder)’ 촬영차 부산에 오는데 출연해 달라는 공문을 받았다. 클레어 드니 감독은 2002년 제7회 부산국제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뒤 부산에 매료돼 다음 영화의 일부를 부산에서 찍겠다고 약속하고 귀국했는데 2004년 3월 이를 지켰다. 아들에게 배를 선물하기 위해 조선회사를 방문한 스위스 갑부에게 주문한 배를 인도하는 조선회사 사장 역할을 맡았다. 이 영화는 그해 9월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상영돼 나는 한동안 해외 영화인들로부터 ‘배우’란 애칭으로 불렸다.

그 뒤 장률 감독의 영화 ‘이리’에선 이리역 폭발사고 30년 뒤 옛 애인을 찾아가 만나는 노신사 역을 맡았다. 임권택 감독의 ‘달빛 길어 올리기’에선 한지 복원에 열중하는 7급 공무원 박중훈에겐 일본 제지업계의 관행을, 제지업자였던 아버지의 행적을 추적하는 예지원에겐 선친의 행적을 각각 들려주는 ‘은퇴한 제지업자’역을 맡았다. 단역이지만 거장과 중진 감독들의 영화에 등장한 것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고 행운이었다.

이처럼 ‘영화제’와 함께 영화 행정가, 교육자, 제작자는 물론 감독과 배우까지 해 본 것은 내재하고 있는 ‘도전’ 의식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제 80대 중반을 넘어선 지금 또 무엇에 도전하게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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