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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서 기르다 버렸다…토끼 보호소 신입 '구찌'의 눈물

중앙일보

입력

지난달 31일, 수원의 유기토끼 보호소 ‘꾸시꾸시’의 문을 열자 마른 풀 냄새가 풍겨왔다. 버려진 토끼 72마리가 사는 보호소의 최고참은 ‘마블’이다. 마블이는 2019년 12월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발견됐다. 주먹 만한 새끼 7마리와 함께였다. 새끼들은 모두 주인을 찾아 떠났지만, 마블이는 여전히 보호소를 지키고 있다.

8월 군포 수리산 자락에서 발견된 ‘구찌’는 비교적 최근 보호소에 합류한 어린 토끼다. 온몸에 구더기가 끓는 채 발견돼 생사를 오갔다. 때문에 이름이 ‘구덕이’가 될 뻔했지만, 보호소는 “좋은 주인 만나 고급스럽게 살라”는 의미를 담아 명품 브랜드 ‘구찌’란 이름을 지어줬다. 구찌는 서울 서대문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기르다 버린 토끼 40여마리 중 하나다.

지난달 31일, 보호소 '꾸시꾸시'에서 토끼보호연대 활동가 임혜영(38)씨가 가장 오래 생활해 온 토끼인 '마블'에게 입맞추고 있다. 마블은 지난 2019년 12월 여의도공원에서 새끼들 7마리와 함께 발견됐다. 최서인 기자

지난달 31일, 보호소 '꾸시꾸시'에서 토끼보호연대 활동가 임혜영(38)씨가 가장 오래 생활해 온 토끼인 '마블'에게 입맞추고 있다. 마블은 지난 2019년 12월 여의도공원에서 새끼들 7마리와 함께 발견됐다. 최서인 기자

짖지도 물지도 못해…조용히 버려지는 토끼

동물자유연대에 따르면 토끼는 개와 고양이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이 유기·유실되는 동물이다. 동물자유연대가 발간한 ‘2016-2020 유실·유기동물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2016~2020년 최소 1605마리의 토끼가 길을 잃거나 버려졌다. 토끼를 받지 않는 보호소들도 많은 데다 예민한 토끼의 특성상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폐사하는 개체도 있기 때문에 유기된 토끼는 알려진 것보다 많을 거라는 게 대다수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한때 ‘토끼 인증샷’ 명소로 떠올랐던 서초구 몽마르뜨 공원에 머물던 토끼들도 대부분 하나 둘 내다버린 토끼들이다. 서초구청 공원녹지과 관계자는 “공원에 주민들이 토끼 유기행위를 했었다. 번식력이 강하다 보니 계속 수가 늘어난 것”이라며 “입양·보호 등으로 수가 꾸준히 줄어 현재 토끼는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토끼보호연대 활동가 임혜영(38·활동명 ‘혜금’)씨는 “중성화를 거쳐 40여마리를 재방사한 후 토끼보호연대에서 데려간 숫자는 10마리가 채 안되고, 나머지는 3년만에 전수 죽었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8월 군포 수리산에서 구조된 '구찌'의 구조 당시 사진(좌)과 상처를 회복한 모습(우). 발견 당시 온몸에 구더기가 끓고 있어 '구찌'라는 이름을 얻었다. 구찌는 ‘굴토끼’로, 유럽의 온화한 기후에 생활하다 가정용으로 개량된 외래종이라 '멧토끼'와 달리 외부에서 생활이 어렵다. 흔히 ‘토끼’하면 떠오르는 종들은 대부분 구찌와 같은 ‘굴토끼’다. 사진 토끼보호연대

지난해 8월 군포 수리산에서 구조된 '구찌'의 구조 당시 사진(좌)과 상처를 회복한 모습(우). 발견 당시 온몸에 구더기가 끓고 있어 '구찌'라는 이름을 얻었다. 구찌는 ‘굴토끼’로, 유럽의 온화한 기후에 생활하다 가정용으로 개량된 외래종이라 '멧토끼'와 달리 외부에서 생활이 어렵다. 흔히 ‘토끼’하면 떠오르는 종들은 대부분 구찌와 같은 ‘굴토끼’다. 사진 토끼보호연대

동물보호단체 봉사자들은 토끼장에 갇힌 채 버려지는 토끼들을 ‘행운아’라고 부른다. 먹이사슬 최하층에 있는 토끼들이 외부 환경에서 살아남기가 녹록치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유기된 토끼들은 대부분 가정에서 키우기 좋게 개량된 외래종이라 생존이 더 어렵다. 활동가 임혜영씨는 “사람들이 토끼는 초식동물이니까 공원이나 뒷산에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공원의 토끼들은 결국 고양이에 쫓기고 각종 질병과 부상에 시달리다가 소리없이 죽게 된다”고 했다.

“라면 사러 갔다 2~3만원에 살 수 있어…유기 조장”

전문가들은 “마트에서 휴지나 라면을 사러 갔다가 2~3만원에 토끼를 사올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유기를 조장한다”고 지적한다. 인천에서 유기동물보호소를 위탁 운영하는 신호숙 수의사는 “생명을 쉽게 사고파는 게 문제다. 토끼는 우선 금액이 싸다”며 “인형처럼 얌전할 거라고 생각하고 쉽게 데려왔는데 번식도 빠르고 똥도 싸고 하니 버리는 경우가 많다. 생명을 쉽게 사고파는 풍조 자체가 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형주 동물복지문제연구소 어웨어 대표는 “자녀들이 원하는데 개나 고양이는 부담스럽고, ‘토끼나 한번 길러볼까’ 라는 생각에 입양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토끼도 동물보호법이 규정하는 ‘반려동물’ 6종(개, 고양이, 토끼, 페럿, 기니피그, 햄스터)에 들어가지만, 무분별한 구매와 유기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는 개나 고양이에 비해서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꾸시꾸시에서 생활하고 있는 토끼 '동키'와 '호테'. 용인시 보호소가 포화되며 옮겨오게 됐다. 지난 2019년 9마리 토끼를 보호하면서 시작된 '꾸시꾸시'는 지난 3년새 72마리가 생활하는 공간으로 덩치가 커졌다. 사진 토끼보호연대 제공

꾸시꾸시에서 생활하고 있는 토끼 '동키'와 '호테'. 용인시 보호소가 포화되며 옮겨오게 됐다. 지난 2019년 9마리 토끼를 보호하면서 시작된 '꾸시꾸시'는 지난 3년새 72마리가 생활하는 공간으로 덩치가 커졌다. 사진 토끼보호연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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