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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명문대 첫 女부총장 "아이 명문대 입학에 집착? 부끄러운 부모" 일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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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여성 옥스퍼드 부총장을 지낸 루이스 리처드슨. [옥스퍼드 홈페이지]

첫 여성 옥스퍼드 부총장을 지낸 루이스 리처드슨. [옥스퍼드 홈페이지]

“자녀의 명문대 입학에 집착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지 마세요.”

영국 옥스퍼드대 첫 여성 부총장을 지낸 루이스 리처드슨(64)이 7년의 임기를 마치고 떠나며 남긴 말이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간)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다. 명문 '옥스브리지(옥스퍼드+케임브리지)'에 자녀를 진학시키기 위한 경쟁은 치열하다. 리처드슨은 그런 경쟁을 하는 부모에게 일침을 날린 것. 그 자신이 옥스브리지 출신이 아닌 점도 있지만, 그의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의 재임 동안 옥스퍼드는 매년 영국 타임스가 선정한 ‘세계 최고 대학’ 자리에 올랐다. 세계적 명문 중 명문으로 꼽히는 이곳의 부(副)수장이었던 그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 그는 텔레그래프에 “훌륭한 대학이 많이 있음에도 옥스퍼드 등에만 (입시가) 집중되는 것에 유감”이라며 “이곳에서 교육을 받지 않아도 훌륭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주장한 훌륭한 삶의 조건은 선명했다. 경험 속에서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고 쫓는 것.

루이스 리처드슨은 영국 텔래그래프와 인터뷰에서 "자녀의 옥스브리지 입학에 집중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텔레그래프 캡쳐]

루이스 리처드슨은 영국 텔래그래프와 인터뷰에서 "자녀의 옥스브리지 입학에 집중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텔레그래프 캡쳐]

1958년 아일랜드 시골에서 7남매 중 첫째로 태어난 리처드슨은 풍족한 가정에서 자라진 못했다. 아버지 홀로 생계를 책임졌고 어머니는 아이들을 키웠다. 넉넉하진 않아도 무탈했던 그의 인생을 바꾼 건 72년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 사건이었다. 영국 식민통치를 받았던 아일랜드가 독립 후에도 차별·억압을 당하자 시위를 벌였고, 이를 진압하러 온 영국군이 시민 14명을 총살한 사건이다. 무장단체 ‘아일랜드 공화국군(Irish Republican Army·IRA)’이 복수 테러를 자행한 계기이기도 했다. IRA 가입까지 마음먹었던 그를 부모가 침실에 가두면서까지 막았고, 그는 그때부터 세상의 모든 테러는 잘못됐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이후 리처드슨은 아일랜드 더블린 트리니티대에 진학해 역사학을 공부했다. 삶에 영향을 준 사건을 떠올리며 더 공부하고 싶은 욕망을 키웠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에서 정치학 석사,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테러 전문가가 됐다. 처음부터 명문대 진학을 목표한 게 아니라, 주어진 삶 속에서 길을 하나씩 찾았다는 것.

'피의 일요일' 사건이 벌어진 1972년 영국군이 한 시민을 붙잡는 모습. AFP=연합뉴스

'피의 일요일' 사건이 벌어진 1972년 영국군이 한 시민을 붙잡는 모습. AFP=연합뉴스

“학창시절 옥스퍼드에 있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부총장가 될 거라고 생각한 적도 없습니다. 제 상상을 초월한 거죠. 저는 제 배경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이고 야심 찬 일을 해왔을 뿐입니다.”  

그는 과거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도 “그저 자녀에게 최선의 교육을 제공하되, 그 주제에 대한 열정을 북돋아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리처드슨은 2006년에 펴낸 책 『테러리스트가 원하는 것(What Terrorists Want)』에서 조지 W 부시 전 미 대통령이 선언한 테러와의 전쟁을 “실패할 운명이었다”고 규정하며 “쥐를 잡기 위해 탱크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탈레반에 오사마 빈 라덴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넘기도록 요구하고, 9·11 테러로 사망한 이슬람교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중동에 방영하도록 만드는 등의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지난 2021년 9·11 테러 20주년을 맞아 연설 중인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 그는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기치로 내걸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시작했다. AP=연합뉴스

지난 2021년 9·11 테러 20주년을 맞아 연설 중인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 그는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기치로 내걸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시작했다. AP=연합뉴스

리처드슨은 옥스퍼드의 행정에 큰 변화를 끌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FT에 따르면, 2017~2021년 사이 옥스퍼드의 공립학교 출신의 비율은 58%에서 68%로 증가했고, 재학생 중 소수 민족의 비율은 18%에서 25%로 늘었다. 그가 “옥스퍼드는 바뀔 수 없다는 신화를 깨뜨렸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다. 리처드슨은 지난해 6월, 영국 고등교육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2등급 작위급 훈장(DBE)을 받았다.

리처드슨은 뉴욕 카네기 재단 회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옥스퍼드 부총장은 신경학자인 아이린 트레이시 교수가 맡는다. 리처드슨은 “후임이 여성이라는 사실이 기쁘다”며 “제 딸이 다른 여성과 경쟁하면서도 그들의 성별이 언급되지 않는 시대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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