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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환 못막은 스토킹처벌법…신당역 사건 후 개정안만 18건

중앙일보

입력

40대 남성 A씨는 어머니에게 사흘에 걸쳐 231통의 ‘전화폭탄’을 퍼부었다. 오전 8시 29분부터 새벽 2시 32분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A씨의 행위는 그간 법원이 판단해 온 ‘스토킹’에 해당하지만, A씨는 처벌받지 않았다. 피해자인 어머니가 처벌을 원하지 않아서다.

2021년 10월 시행된 ‘스토킹 범죄 처벌 등에 관한 법률(스토킹처벌법)’이 시행 1년 2개월을 넘겼다. 법 시행이 무색하게 이후에도 무수한 스토킹 범죄와 살인사건이 이어졌다. 이처럼 스토킹처벌법이 미흡하다는 지적 때문에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개정안만 31건이다. 법무부도 개정안 입법예고를 마쳤다.

31건의 스토킹처벌법 개정안을 통틀어 가장 빈번하게 논의되는 쟁점은 ‘반의사불벌죄 폐지’ 여부다. 이밖에 어떤 쟁점들이 있는지 기존의 법원 판결을 통해 살펴봤다.

① 논의 1순위 ‘반의사불벌죄 폐지’

A씨처럼 어머니가 아들을 생각하는 감정에서 선처를 바란다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처벌 불원’이 더 큰 문제로 비화하는 경우도 많다. 지난해 9월 신당역 역무원 살인사건 당시 피의자 전주환은 피해자에게 합의를 요구하고, 증거를 내놓으라며 연락을 취하기도 했다. 스토킹 범죄가 반의사불벌죄가 아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지난해 9월 서울 신당역 살해 피의자 전주환이 남대문경찰서에서 검찰로 이송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9월 서울 신당역 살해 피의자 전주환이 남대문경찰서에서 검찰로 이송되고 있다. 연합뉴스

다만 스토킹 행위 자체의 위해성이 큰 경우,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했는데도 처벌된 사례도 있다. 울산지법은 지난해 9월 한 달 남짓 만났던 연인을 스토킹한 40대 남성 B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B씨는 전 연인의 직장에 찾아가 자해한 왼쪽 손목을 보여주며 대화를 요청하고, 놀란 피해자가 차로 그를 병원에 태워다주는 와중에 “내가 왜 왔을 것 같아”라고 말하며 캠핑용 칼을 만지작대는 등 특수협박 및 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해자와 원만히 합의해 피고인에 대한 처벌을 원하지 않는 점”을 언급했지만, 특수협박과 스토킹처벌법 혐의를 유죄로 인정하고 따로 공소기각하지 않았다.

② 유명무실 ‘잠정조치’

스토킹 범죄를 저질러 법원에서 ‘접근금지’나 ‘통신금지’ 등의 잠정조치에 처해진 피고인이 또 스토킹 범죄를 저지른 경우도 많았다. C씨는 전 연인 앞에서 깨진 병으로 자해하고 공동현관을 침입해 초인종을 눌러댔다. 또 3시간 사이 88회 전화를 걸고, 지포라이터 오일을 몸에 뿌린 채 라이터를 들고 “문 열어 달라”고 하기도 했다.

수원지법은 C씨에 대해 100m 이내 접근금지 및 휴대전화·e메일 등으로 메시지를 보내지 못하도록 하는 잠정조치 처분을 내렸지만, C씨는 이틀 뒤 또 피해자의 집에 찾아갔고, 결국 스토킹처벌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지난해 10월 정부과천청사 법무부에서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및 '전자장치 부착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 입법예고를 앞두고 세부 내용을 공개,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지난해 10월 정부과천청사 법무부에서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및 '전자장치 부착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 입법예고를 앞두고 세부 내용을 공개,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처럼 유명무실한 잠정조치를 개선하기 위해 법무부 개정안에는 잠정조치 기간에 전자추적장치 부착 등을 포함한 내용이 들어있다. 권경애 법무법인 해미르 변호사는 “피해자들의 일상생활 제약 정도가 심각하기 때문에 요건이 분명하다면 가해자들에게 가해지는 강제조치를 신중하게 고려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③ 집요한 ‘부재중 전화’는 스토킹?

스토킹처벌법 사건에서 판결이 재판부마다 다른 지점은 ‘부재중 전화’에 대한 해석이다. 과거 정보통신망법상 ‘도달’ 행위에, 받지 않은 전화도 포함되느냐에 대한 논쟁이다.

지난해 2월 서울남부지법은 전 연인에게 발신자 표시제한으로 열흘간 134회 전화를 건 D씨에게 징역 10개월에 2년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서울중앙지법도 지난해 12월 2주간 교제한 전 연인에게 6주간 226회 전화를 건 50대 남성에게 실형 6개월을 선고했다. ‘부재중’ ‘차단’ ‘거절’ 전화도 불안감·공포감을 일으켰다면 법이 정한 스토킹에 해당한다고 본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인천지법은 지난해 11월 “상대방이 받지않아 벨소리만 울렸고 ‘부재중 전화’로 표시됐다면 스토킹처벌법으로 처벌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 채다은 법무법인 시우 변호사는 “‘부재중 전화’ 자체가 접근 행위이고, 스토킹처벌법이 막고자 하는 ‘집요하게 괴롭히는 행위’”라며 “과거 정보통신망법에 근거한 대법원 판례를 따라 일부 판결이 ‘부재중 전화’를 ‘피해자에게 도달하지 않은 정보’로 보고 있지만, 지나치게 기술적인 부분에 치중한 해석”이라고 말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발의된 스토킹처벌법 개정안 31건 가운데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이후 발의된 것만 18건. 법무부도 개정안 입법예고를 끝내고 법제처 심사 중이다. 정부안이 국회에 제출되면 이들 개정안에 대한 논의가 함께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법사위 관계자는 “전자발찌 등 법리적으로 엄밀하게 다뤄야 할 지점도 있고, 여야 합의 및 정부안까지 모두 포괄해 처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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