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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훈 기준은 국가 백년대계 정체성, 정권따라 바꾸면 안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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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0호 09면

박민식 국가보훈처장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이 서울지방보훈청에서 중앙SUNDAY와 인터뷰하고 있다. 최영재 기자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이 서울지방보훈청에서 중앙SUNDAY와 인터뷰하고 있다. 최영재 기자

널리 알려진 대로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은 7살 때 베트남전에서 산화한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보훈가족 출신이다. 윤석열 정부의 첫 보훈처장으로 임명된 그의 소명의식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지난 27일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 응한 박 처장은 “보훈이야말로 보수와 진보의 갈등 없이 국민통합에 기여하는 영역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여태껏 미흡했거나 잘못됐던 부분을 하나하나씩 바로잡는 일을 해 왔다”고 말했다.

취임사에서 올바른 보훈 정체성을 확립하겠다고 강조했다. 박 처장이 생각하는 보훈 정체성이란 뭔가.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치신 분들 앞에서 국가는 차별 없이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 하지만 국가유공자로 인정된 독립운동가와 광복군에 대한 예우와는 달리 천안함 폭침, 연평도 해전 등의 피해자들에 대해선 보훈 지원 정책이 부족했던 게 현실이다. 천안함·연평도의 경우 전사자나 순직자뿐 아니라 육체적·정신적 상처를 입은 분들도 정당한 보상과 예우를 받아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가령 행정적으로 피해 당사자에게 피해 사실을 입증하도록 요구하고 있는데 이는 오히려 고통을 가중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보훈 심사 기간을 내년부터 대폭 단축하기로 했다.”
보훈이 국민통합에 기여하긴커녕 분열과 갈등을 부추긴 적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광복회의 내부 횡령 비리가 대표적 사례 아닌가. 개인의 이익을 위해 부정부패를 일삼는 등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명예를 악용하는 사례가 있어선 안 된다. 지난 8월 고강도 감사를 통해 사업비 운영 등을 살펴보니 전임 회장이 8억원대의 비리를 저지르며 꽤 오랫동안 광복회를 사유화해 왔더라.”
최근 안중근 의사를 소재로 한 영화 ‘영웅’이 흥행에 성공하고 있다.
“보훈처는 안 의사가 중국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 뒤 인근 공동묘지에 매장됐다는 사료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다. 지난 10월엔 안 의사 유해가 하얼빈산 소나무로 만든 관에 안치됐다는 순국 당시의 중국 현지 보도를 보훈처가 찾아냈다. 너무나 귀중하고 유익한 단서다. 이렇게 하나하나 수집한 역사적 증거들을 지렛대 삼아 중국 정부와 유의미한 협의를 이뤄내려 한다.”
윤동주 시인의 유해도 중국에 안장돼 있는 것으로 안다.
“맞다. 아시다시피 중국은 윤 시인을 ‘조선족’으로 분류하고 있다. 우리는 윤 시인을 당연히 대한민국 국민으로 생각하지만 뒤늦게 살펴보니 서류상 국적이 없는 상태였다. 오랫동안 직계 후손이 없는 무호적 독립유공자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유해 봉환이 추진될 경우 국적 문제가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선 지난 7월 윤 시인의 가족관계등록부를 만들고 ‘본적’에 해당하는 등록기준지를 독립기념관 주소로 등록했다. 이걸로 당장 유해 봉환이 가능해졌다고 할 수는 없지만 조금이나마 진척을 이루길 기대한다.”
유해 봉환을 추진하는 유공자가 더 있나.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주인공 이병헌 역할의 모티브가 된 황기환 선생을 꼽을 수 있다. 황 선생은 임시정부 시절 파리위원부 서기장으로 활동하는 등 미국과 유럽에서 독립운동을 하신 분이다. 1923년 미국에서 서거하신 황 선생이 2008년 뉴욕 마운트 올리벳 묘지에 안장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황 선생의 유해도 봉환하기 위해 힘써왔다. 무엇보다 2023년은 황 선생께서 순국하신 지 100년째 되는 해다. 황 선생을 국내로 꼭 모실 수 있도록 뉴욕 법원에 파묘 및 이장 허가를 요청하고 최종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보훈처의 내년도 예산안을 살펴보면 6·25 전쟁 과정에서 다부동 전투를 이끈 백선엽 장군의 동상 건립 비용도 편성됐다. 보훈처는 국비 1억5000만원을 포함해 총 5억원을 들여 내년 상반기까지 경북 칠곡군 다부동에 위치한 6·25 기념 시설에 동상을 설치할 계획이다. 하지만 일각에선 백 장군의 과거 친일 행적에 문제를 제기하며 동상 건립 예산의 적절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박 처장은 “백 장군은 6·25 전쟁의 영웅이자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한 호국의 별이란 사실은 변함없다”며 추모 공간 조성을 통해 호국 영웅의 공적을 제대로 기리겠다는 입장이다.

서훈을 받은 국가유공자를 둘러싼 행적 논란은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텐데 보훈처의 구체적인 입장은.
“지난 정부 때인 2018년 서훈 심사 기준이 완화되면서 독립운동가나 광복군이 광복 이후 사회주의 활동을 했더라도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하거나 적극적으로 동조한 게 아니라면 일부 일탈이 있더라도 포용적 차원에서 과거 독립운동을 폭넓게 인정하는 걸 원칙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를 ‘적극 동조’로 해석할지 논란이 가중되고 있어 이에 대해 내부 의견을 수렴 중이다.”
독립유공자서훈 공적심사위원 중 일부가 편향돼 있다는 지적도 있는데.
“편향된 역사관을 가진 위원이 있다면 공론화를 통해 재정비의 기회를 마련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전 정부에서 심사 기준이 아무런 숙의 과정 없이 변경됐고 기준 역시 모호해지면서 국민 정서와 다소 맞지 않는 논란들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훈 기준은 백년대계로 이어가야 할 국가 정체성이다. 정권에 따라 혹은 진영에 따라 마음대로 변경해선 안 된다. 이런 사회적 논란이 더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재 서훈 기준이 적정한지, 좀 더 명확하게 개선이 필요한지 등에 대해 검토 단계에 있다.”
새해는 6·25 정전 70주년이다. 준비하고 있는 기념사업들이 있다면.
“유엔군이 대한민국 땅을 처음 밟았던 부산 등 의미 있는 지역으로 22개 참전국 정부 대표를 초청해 정부 기념식을 진행할 예정이다. 해외에선 메이저리그 등 한국인 스포츠 선수들이 활동하고 있는 구단들 협조를 받아 현지 참전 용사들을 경기장으로 초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행사도 준비하고 있다.”
2024년 총선을 앞두고 있는데 여의도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나.
“부산의 지역구에서 재선한 국회의원이지만 지금은 국가 보훈을 관장하는 공직자로서 호국 정신과 가치를 바로잡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고 앞으로도 본연의 역할에 충실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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