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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기 믿고 집 샀는데 위조 사기, 법적 효력 없어 보상길 막막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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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호 04면

‘빌라왕’ 사태로 본 등기부등본 문제점

등기사항증명서(등기부등본)는 부동산을 거래할 때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서류다. 소유권, 근저당권 등 부동산의 권리관계가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근 수도권에 빌라와 오피스텔 1139채를 매입해 전세사기를 벌이다 사망한 ‘빌라왕’ 김모씨의 피해자들은 등기부의 근저당권과 특약 등을 꼼꼼하게 확인했지만 시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보증금을 제대로 돌려받지 못했다. 그런데 등기부등본에 명시된 내용조차 실제 권리 관계와 달랐다면? 혹은 등기부등본에 없던 대출이 뒤늦게 밝혀졌다면? 생각만으로도 기가 막힌 상황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2017년 4월 A씨는 서울 화곡동의 한 빌라를 매매하며 은행으로부터 1억1900만원을 대출받았다. 빌라엔 1억4280만원의 근저당권이 설정됐고, 등기부에 기재됐다. 하지만 두 달 뒤 A씨가 근저당권 말소에 필요한 서류와 은행의 법인인감을 위조해 등기소에 제출했고, 등기부등본상에서 근저당권이 말소됐다. 실제로는 대출금을 갚지 않았지만 갚은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등기 신청 매년 800만건 넘어

이후 2017년 7월 B씨는 근저당권이 없는 등기부등본을 확인하고 해당 빌라를 샀다. 은행으로부터 주택담보대출도 받았다. 몇 년 후 2020년 잘 살고 있던 집에 갑자기 법원 소장이 날아왔다. 이전 집주인 A씨가 받은 대출이 말소되지 않았으니 등기부등본에 다시 근저당권을 회복시키라는 내용이었다. 은행은 A씨의 대출금을 받아내기 위해 집을 경매에 넘겼다. B씨는 억울했다. 전 주인의 대출로 빌라에서 나가야 한다니 납득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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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법원은 1심, 2심에 이어 지난 7월 대법원 판결까지 모두 근저당권을 다시 회복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등기부상에서는 근저당이 말소됐지만 실제로는 채무 상환이 되지 않았으므로, 근저당 말소는 무효라는 것이다. B씨가 입은 손해는 A씨와 민사로 해결해야 하는데 이미 사기 등의 범죄로 수감된 데다 서류를 위조한 전력이 있는 A씨에게 손해를 보상받기란 쉽지 않을 전망이다.

그래픽=남미가 nam.miga@joongang.co.kr

그래픽=남미가 nam.miga@joongang.co.kr

등기부등본은 집의 이력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서류다. 법원에 따르면 지난달 부동산등기 열람 지수는 119.54를 기록했다. 해당 지수는 2014년을 기준으로 등기부 열람 건수의 증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지난달 등기부등본 열람 횟수가 기준치 대비 19.54% 증가했다는 의미다. 지난해 12월부터 지난달까지 최근 1년간 등기 신청 건수는 851만6632건에 달한다. 소유권 이전(16만6374건), 근저당권 설정(11만5350건), 근저당권 말소(9만4537건) 등을 등기부에 기재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B씨가 등기부등본을 발급한 법원을 상대로 구제를 신청할 방안은 없을까?

안타깝게도 현행법상 등기부등본은 공신력이 없다. 따라서 법원에 ‘등기부등본을 보고 대출이 없는 줄 알고 샀으니 법원이 보상하라’는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정보를 제공하는 공시의 기능만 가지고 있을 뿐 공시한 내용에 대해 책임을 지지는 않는다. 쉽게 말해 부동산의 권리 관계에 대해서 알려주고는 있지만, 그 내용에 대해 국가가 보장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등기부등본을 열람하면 가장 마지막 장 하단에 ‘등기사항증명서는 법적인 효력이 없습니다’라는 말이 기재돼 있다. 내년도 주택 매매를 준비하던 김모(45)씨는 “등기부등본도 믿을 수 없다면 대체 무엇을 보고 거래를 해야 하냐”며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등기부등본의 공신력을 인정하지 않는 배경은 광복 직후 민법이 제정된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국회는 민법을 제정 및 공포하며 “부동산 소유권을 인정하려면 당사자가 서로 거래에 동의할 뿐만 아니라 ‘등기’하는 게 필요하다”는 조항을 넣었다. 자연스럽게 등기부등본을 믿을 수 있느냐는 문제가 제기됐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을 겪으며 자료가 없어지고, 소유관계가 불명확해졌기 때문이다. 결국 등기부등본의 공신력 인정은 어렵다는 결론이 나왔다. 현재 등기소가 실제 소유 관계를 면밀히 조사하지 않고 서류로만 권리관계를 확인하는 형식적 심사주의를 따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등기부등본만을 믿고 거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지난달 16일 대한법무사협회는 “등기제도는 국가가 예산과 인력을 투입해 부동산의 권리관계에 대해 공적으로 확인하고 공개하는 제도”라며 “등기부를 신뢰한 제3자의 귀책사유가 없다면 국가가 금전적 피해보상을 해주는 제도의 도입을 적극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장 등기의 공신력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현시점에서 피해자 보호 및 유사 사례 예방을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등기부등본에 공신력을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김예림 부동산 전문 변호사는 “허위 등기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절차를 보완하고, 등기의 공신력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임상영 법무법인테오 대표변호사도 “공신력을 인정하거나 등기소가 실질적인 심사권을 갖도록 해서 근저당 말소를 한 번 더 확인하는 절차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등기소, 형식적 심사주의 따라

반면 개인이 사보험으로 대비할 필요가 있다는 제안도 나온다. 서진형 경인여대 MD비즈니스학과 교수는 “등기부 공신력을 인정하면 정부가 실질적 심사권을 갖게 돼 등기 한 건을 처리하는 데 6개월 이상 걸릴 수 있다”며 “국가에서 손해를 배상해주면 작정하고 사기 치는 사람들이 급증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에서 부동산에 대한 소유권과 지분 등을 보증하는 권리보험이 활성화된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며 “이제는 미래의 위험에 대비해 국민도 어느 정도 비용을 부담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부동산권리보험은 등기부등본, 권리증, 주민등록증 등 서류를 위조해 발생하는 손해, 소유권이 중복등기여서 발생한 손해 등 소유권 이전에 문제가 생겼을 때 발생하는 손해를 보상한다. 다만 현행대로라면 B씨 사례처럼 서류를 위조해 등기부 상 근저당을 말소한 건에 대해서는 보상이 어렵다. 국내에서 부동산권리보험 상품을 판매하고 있는 하나손해보험 관계자는 “현재는 보험사에서 직접 매도인의 근저당권을 확인할 수 없다”며 “매수인을 위해 매도인의 개인정보를 금융기관에서 열람할 수 있는 법이 만들어져야 등기부의 근저당권까지 보장하는 상품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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