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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 미국 간 젤렌스키 “자유 위한 싸움”…처칠 데자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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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21일 미국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회담하는 조 바이든 대통령(오른쪽)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바이든은 185억 달러 규모의 추가 군사 지원 계획을 밝혔다. [AFP=연합뉴스]

21일 미국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회담하는 조 바이든 대통령(오른쪽)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바이든은 185억 달러 규모의 추가 군사 지원 계획을 밝혔다. [AFP=연합뉴스]

국방색 라운드넥 스웨트셔츠에 카고 바지, 황토색 부츠. 지난 21일(현지시간) 약 8000㎞를 날아 미국 국회의사당 연단에 오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옷차림은 전날 최격전지인 돈바스 지역 바흐무트를 찾았을 때 그대로였다. 지난달 중간선거 결과에 따라 내년 1월 새 출범하는 미 연방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전시(戰時) 대통령’은 “여러분의 돈은 기부가 아니라 세계 안보와 민주주의에 대한 투자”라며 “우리는 가장 책임 있는 방식으로 그것을 다루고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300일 만에 처음으로 조국을 떠나 미국을 극비 방문한 이유가 이 한마디로 요약됐다. 우크라이나 지원 예산 450억 달러(약 57조원)가 포함된 1조7000억 달러(약 2167조원) 규모의 2023 회계연도 정부 예산안 통과를 간곡히 부탁하면서 “승리를 앞당기기 위해” 계속 지원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메시지의 힘을 위해 통역을 쓰는 대신 영어로 20여 분간 연설했다. 전직 코미디언답게 유머를 섞고, 우크라이나인들이 보낼 크리스마스를 언급하며 미국인들이 ‘내 일’처럼 느끼도록 하는 데 공을 들였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전쟁 승리를 위한 미국 지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우리에겐 대포가 있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충분하냐고요? 솔직히 아닙니다”고 말하자 좌중에서 웃음이 터졌다. 의회 일각에서 백지수표식 지원에 제동을 거는 목소리가 나오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는 더 달라고 압박하는 현실을 유머로 승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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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하원의원 213명 중 86명만 참석

21일 미국 워싱턴DC 인근 앤드루스 공군기지에 도착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왼쪽). 뒤쪽에 그가 탑승했던 미 공군 수송기 C-40B가 보인다. [AFP=연합뉴스]

21일 미국 워싱턴DC 인근 앤드루스 공군기지에 도착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왼쪽). 뒤쪽에 그가 탑승했던 미 공군 수송기 C-40B가 보인다. [AFP=연합뉴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틀 뒤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면서 우크라이나인들은 아마도 촛불을 켤 텐데, 로맨틱해서가 아니라 전기가 없기 때문”이라며 러시아가 에너지 인프라를 파괴해 수백만 명이 난방도, 수돗물도 없는 상태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불평하거나 누구의 삶이 더 편한지 비교하지 않겠다면서 “미국의 안녕이 미국이 독립을 위한 투쟁과 여러 승리를 통해 얻은 국가 안보의 결과물이듯 우크라이나인들도 우리의 독립과 자유를 위한 전쟁을 존엄과 성공으로 치러 승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이 일본의 진주만 공습 다음 날인 1941년 12월 8일 미국 의회에 전쟁 선포를 요청하며 한 연설을 인용하기도 했다. 루스벨트의 연설 중 “미국 국민은 정의로운 힘으로 절대적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구절을 낭독한 뒤 “우크라이나 국민도 절대적으로 승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바흐무트 전장의 군인들이 서명한 우크라이나 국기를 펠로시 의장에게 전달했고, 펠로시 의장은 이날 의사당에 게양한 성조기를 나무함에 담아 답례했다. 상·하원 의원들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의사당에 입장한 뒤 2분여간 손뼉을 치며 환영했고, 연설 중간중간 여러 차례 기립박수로 지지를 표현했다. 그러나 공화당 하원 의원 213명 중 86명만이 연설에 참석했고, 기립박수 때도 일부 공화당 의원들은 그대로 앉아있었다고 정치 전문지 더힐이 전했다. 차기 의회에서 하원 다수당이 되는 공화당은 우크라이나 지원에는 찬성하면서도 무조건적 지원에는 비판적 입장을 밝혀왔다.

앞서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질 바이든 여사와 함께 백악관 현관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을 맞았다. 바이든 대통령은 푸른색과 노란색 스트라이프 넥타이를, 질 여사는 하늘색 코트를 입었다. 하늘색과 노란색은 우크라이나를 상징한다.

젤렌스키 10시간 방미 끝내고 귀국

처칠

처칠

바이든 대통령은 정상회담 후 가진 공동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185억 달러(약 2조3000억원) 규모의 추가 군사 지원 계획을 발표했다. 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 중 단일 지원으로는 가장 큰 규모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 지원 패키지에는 패트리엇 미사일 포대가 포함된다”고 말했다. 장거리 지대공미사일 시스템인 패트리엇은 지금까지 우크라이나에 제공한 무기 중 가장 첨단으로, 우크라이나의 전력 강화뿐 아니라 미국과의 굳건한 연대를 상징한다.

바이든 대통령은 젤렌스키 대통령을 초대한 배경에 대해 “미국 국민과 전 세계가 2023년까지 계속해서 단결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듣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전쟁이 금방 끝나지 않을 것으로 믿고 있다고 뉴욕타임스는 해석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새벽 우크라이나에서 철도를 이용해 폴란드 제슈프로 이동한 뒤 신변 안전을 위해 미 공군 수송기 C-40B에 탑승해 미국으로 입국했다. 그는 이동 과정에 러시아의 요격에 대비해 일부 구간에선 미군 조기경보기(AWACS)와 F-15E 전투기의 호위를 받기도 했다.

이번 방미가 81년 전인 1941년 12월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전쟁 중 워싱턴을 방문한 것을 연상시키면서 “젤렌스키가 처칠의 뒤를 이었다”(BBC)는 평가도 나왔다. 처칠 전 총리는 루스벨트 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의회 상·하원 합동 연설 후 나치 독일과 제국주의 일본을 제압하기 위한 미국과의 동맹을 다졌다. 젤렌스키 대통령도 정상회담과 의회 연설을 포함해 불과 10여 시간 머무른 긴박한 일정이었지만, 솔직한 발언과 부드러운 태도로 미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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