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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연중 기획 혁신창업의 길

에디슨을 넘본다…21세기 황금 ‘그래핀’ 혁명 일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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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고석현 기자 중앙일보 산업부 기자

[연중 기획 혁신창업의 길] R&D 패러독스 극복하자 〈37〉 홍병희 그래핀스퀘어 대표

그래핀스퀘어 대표 홍병희 서울대 교수가 지난 7일 경기 수원시 영통구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 실험실에서 ‘최첨단 나노 소재’ 그래핀을 들어 보이고 있다. 김상선 기자

그래핀스퀘어 대표 홍병희 서울대 교수가 지난 7일 경기 수원시 영통구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 실험실에서 ‘최첨단 나노 소재’ 그래핀을 들어 보이고 있다. 김상선 기자

‘전기토스터를 쓰기 2분 전 전원을 켠다. 빵은 0.5인치(약 1.27㎝) 두께로 썰고, 테두리를 잘라낸다. 기기에 빵 2~4조각을 넣고 1분쯤 지나면 잘 익은 갈색이 된다.’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 설립한 뉴욕에디슨(현 제너럴일렉트릭)에서 1911년 펴낸 『전기요리 레시피』에 나오는 전기 토스터 사용법이다. 전기 토스터가 개발되기 전엔 간편식의 대표 주자 토스트도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었다. 하지만 에디슨이 1909년 전기 토스터를 선보이면서 금속 코일을 활용한 조리·난방기구는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홍병희(51) 서울대 화학부 교수는 꿈의 신소재 ‘그래핀’으로 100년 넘게 이어져 온 에디슨의 ‘코일 전열기술’에 도전장을 냈다. 자체 개발한 그래핀 생산 기술을 바탕으로 2012년 그래핀스퀘어를 창업하면서다. 지난 7일 경기 수원시 영통구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 그래핀스퀘어 사무실에서 만난 홍 대표는 “그래핀 전열기술로 에디슨의 코일 전열기술을 대체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녹슬지 않는 탄소물질 양산 성공
철보다 100배 강한 나노 소재

에디슨 ‘코일전열기술’ 대체 기대
토스터 등 조리기구부터 선보여

타임지 ‘2022년 최고 발명품’ 선정
자동차·반도체 등 활용대상 무궁

“시간이 지나면 녹슬고 산화하는 금속과 달리 그래핀은 영원히 변치 않는 다이아몬드와 같습니다. 온도를 400도까지 올려도 내구성이 뛰어나 전열기구로 만들었을 때 수명이 길고 에너지 효율도 좋지요.”

그래핀은 흑연의 한 층으로, 탄소 원자가 평면에 육각형으로 연결된 투명 물질이다. 두께는 종이보다 100만 배 얇은 0.33나노미터(㎚) 밖에 되지 않지만, 강도는 강철보다 100~300배 강하다. 열 전도성이 뛰어나고, 전자 이동속도는 반도체인 실리콘보다 140배 이상 빠르다. 이 때문에 ‘꿈의 신소재’ ‘21세기 황금’이란 별명이 따라다닌다. 하지만 양산 기술이 없는 게 한계였다.

CES 2023 ‘최고 혁신상’ 예약

그래핀스퀘어는 직접 개발한 양산 기술로 그래핀의 산업화를 주도하고 있는 업체다. 최근 출시한 조리기구 ‘그래핀 키친 스타일러’(토스터)와 전열기구 ‘그래핀 라디에이터’로 글로벌 가전 시장에도 진출한다. 홍 대표는 “글로벌 기업과 그래핀 상용화 연구를 하던 중 주방기기로 눈을 돌렸다”며 “그래핀 전열판에 빵과 고기를 구웠더니 맛있게 구워지더라. 그래핀의 특성을 살려 투명한 제품에 디스플레이를 탑재하는 등 상상력을 발휘했다”고 말했다.

‘그래핀 키친 스타일러’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2022년 최고 발명품’에 선정됐다. 타임은 “2분 만에 화씨 570도(섭씨 298도)까지 올라가 오븐·그릴·버너·보온기 등으로 사용할 수 있다”며 “제품이 투명해 토스트(또는 스테이크·쿠키)가 구워지는 것을 볼 수 있고, 완벽한 고소한 맛을 보장한다”고 평가했다. ‘그래핀 라디에이터’는 내년 1월 열리는 세계 최대 정보기술(IT) 전시회 CES 2023에서 ‘최고 혁신상’을 받았다. 두 제품은 내년 초 글로벌 크라우드펀딩 사이트를 통해 판매될 예정이다.

세계 첫 그래핀 대량 합성 기술

홍 대표가 그래핀을 본격 연구하게 된 것은 2004년 박사후연구원으로 김필립(현 하버드대 교수)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 연구실에 몸담으면서다. 김 교수는 ‘그래핀에서는 전자가 질량이 없는 것처럼 아주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는 물리적 성질을 밝혀낸 인물이다. 이보다 앞서 2004년 영국 맨체스터대 안드레 가임 교수와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교수가 흑연 덩어리에 스카치테이프를 붙였다 떼어내는 방식으로 그래핀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가임·노보셀로프 교수는 2010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홍 대표는 2008년 ‘화학기상증착(CVD) 공법’을 선보였다. 세계 최초로 화학적 방법으로 그래핀을 합성하는 데 성공했다. 스카치테이프로 떼었을 땐 마이크로미터 크기라 육안으로는 볼 수 없었던 그래핀을 화학적 방법으로 손톱 크기까지 키워낸 것이다. 이 논문은 2009년 세계적 학술지 ‘네이처’에 실렸고, 2010년 ‘제1회 홍진기 창조인상’을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윤전기가 신문을 찍어내듯 그래핀을 전사해 롤 형태로 말아내는 기술도 개발했다. 제품을 대량 생산할 수 있어 그래핀 소재 양산에 게임 체인저가 된 기술이다.

그래핀스퀘어에 투자한 조준석 BSK인베스트먼트 상무는 “그래핀은 우수한 소재지만 가격이 너무 비싼 게 약점이었다”며 “그래핀스퀘어의 CVD 합성 방식은 오차 없이 정확하게 그래핀을 합성할 수 있어 양산에 적합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김흥락 포항산업과학연구원(RIST) 박사는 “노벨상 수상 기술은 보통 15~20년 뒤 산업화로 꽃을 피우는데, 그래핀도 곧 그 시기가 올 것으로 본다”며 “앞으로 그래핀 생산이 본격화해 생산 단가가 저렴해지면 반도체·음극재 소재, 자동차부품 등에서 기존 소재를 대체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제품은 종합예술” 양산라인 준공

홍 대표가 처음부터 그래핀 기술로 창업하려던 건 아니었다. 실험실 제자들의 고충을 덜어주기 위해 시작한 일이 눈덩이처럼 불어 회사까지 차리게 된 ‘어쩌다 창업’ 케이스다.

“네이처에 논문을 발표한 뒤 전 세계 학계와 기업에서 그래핀 샘플을 보여달라는 요청이 쇄도했습니다. 제자들이 연구는 못 하고 그래핀 샘플 만들기만 매달려야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제조 기술을 회사에 넘겨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창업을 결심했습니다. 그 뒤엔 저희가 사용하는 그래핀 제조 장비를 팔라는 요청이 들어와서 사업이 커졌어요. 연구는 계획을 세워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데, 사업은 모르던 분야라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래핀스퀘어는 지난달 14일 경북 포항시 남구 나노융합기술원에 양산 시설을 준공했다. 첨단센서 및 반도체부품용 8인치(약 20㎝) 그래핀웨이퍼를 연간 10만장 생산할 수 있는 규모다. 홍 대표는 “반도체웨이퍼·가전에 들어갈 폭 170㎜ 그래핀롤 생산은 최적화에 성공했고, 500㎜ 폭까지 늘려 양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늘어나는 그래핀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2027년까지 생산시설을 지속해서 확충할 계획이다.

홍 대표는 “양산에 얼마나 많은 엔지니어링 노하우가 들어가는지 몰랐다. 기술은 이미 개발했으니 쉽게 생산라인도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다”며 “신뢰성 있는 제품이 균일하게 나와야 하는데 황금 수율인 80%에 도달하는 건 정말 종합예술이더라”라고 돌이켰다.

미래 전기차 ‘게임 체인저’

그래핀스퀘어는 글로벌 기업들과 함께 그래핀을 디스플레이·자동차·바이오 등에 적용하는 실험도 진행 중이다. 전기차용 그래핀 유리를 비롯해 반도체 극자외선(EUV) 노광공정 펠리클(포토마스크의 오염을 막기 위한 덮개), 전기차 카메라렌즈·라이다 제상(성에 제거) 난방, 2차전지용 집전체, 질병 진단용 센서 등이다.

이 가운데 전기차용 유리는 미래 전기차 산업의 판도를 바꿀 핵심 기술로 꼽힌다. 자동차 앞 유리에 습기나 성에가 생기면 내연기관차는 엔진의 폐열을 내뿜어 제거하는데, 전기차는 엔진의 열기가 충분치 않다. 그래핀 유리가 개발되면 낮은 전력을 소모하면서도 효율적으로 앞 유리 성에·습기를 제거할 수 있다. 홍 대표는 “현재 글로벌 자동차 기업이 신뢰성 평가를 진행 중인데 2025년쯤 상용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1인 1 창업…고교 때부터 준비를”

홍 대표는 “조만간 1인 1 창업의 시대가 올 것”이라며 “고등학교 때부터 창업 교육을 하는 등 살아있는 지식을 가르쳐야 한다”며 창업 조기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평생 연구했던 기술은 알았지만, 돈이나 사람에 대해 너무 몰랐어요. 창업의 세계는 단단히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올해로 창업한 지 10년인데 문 닫을 위기가 세 번 있었어요. 계약서 한 줄을 놓쳐 상대 기업과 10년 독점 협업 계약이 돼 있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시행착오를 바로잡는 데 상당 시간을 허비했지요. 이런 실수를 후배 창업자들이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는 실제로 창업 전도사이기도 하다. 그래핀스퀘어 직원이나 연구실 제자들에게도 평소 “연구한 그래핀 기술로 분사해서 나가라”고 강조한다. 졸업 뒤 그래핀스퀘어에 몸담았던 제자 두 명은 그래핀을 활용한 신약 개발 기술로 ‘바이오그래핀’을 2017년 설립해 독립했다. 바이오그래핀은 그래핀 양자점의 특성을 활용해 그래핀을 약물 전달 플랫폼으로 한 파킨슨·알츠하이머병 신약후보 물질을 개발했다.

“미국에선 스탠퍼드대를 중심으로 실리콘 소재 기술이 혁명적 변화를 이끌며 실리콘밸리가 만들어졌고, 3·4차 산업혁명의 주역이 됐습니다. 그래핀이라는 탄소 소재가 하나의 산업군을 형성하고,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플랫폼이 됐으면 합니다. 현재 그래핀스퀘어 본사가 자리 잡은 포항에 실리콘밸리를 넘는 ‘그래핀밸리’를 만들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