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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의 그늘인가? 상속분쟁 급증하는데 유언장은 남의 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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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신성식 기자 중앙일보 복지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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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식 복지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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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A씨가 숨지고 3층 단독주택을 유산으로 남겼다. A씨는 생전에 이게 화근이 될 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이 집은 재개발지구에 포함되면서 시세가 10억~15억원으로 뛰었다. A씨는 생전에 40대 아들에게 “집을 주겠다”고 했다. 아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내세워 더 많은 몫을 가지려 했다.

그런데 세 딸이 “우리한테도 준다고 했다”고 반기를 들었다. 아들은 아버지 병원행에 동행하는 등 아버지 집을 오가며 돌봤다. 이를 내세워 더 많이 상속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A씨의 아내는 아들 편을 들었다. 딸들도 “우리도 돌봤다. 법대로 나누자”고 맞섰다. A씨의 아내와 아들이 한편이 되고 세 딸이 연합해 싸웠다. 결국 소송으로 비화해 상속재산 분할심판을 받게 됐다. 재판부는 아들에게 55%(어머니의 양도 지분 포함), 딸들에게 각각 15%를 나누도록 조정했다.

가족파탄 빚는 상속분쟁 약 5만건
‘삶의 존엄한 마무리’ 화두와 역행
유언장 있으면 갈등 줄일 수 있어
“일본식 유언장 공적보관 도입을”

A씨 사망 후 약 2년간 골육상쟁을 벌였고, 그동안 감정 대립이 갈 데까지 갔다. 형제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딸도 ‘원수’가 됐다. 과거에 섭섭했던 나쁜 기억을 서로 들췄고, 말실수를 물고 늘어졌다. 아들 편을 드는 어머니에게 딸들이 “진짜 아들이 맞느냐”는 말까지 나왔다. 결국 A씨는 재산을 상속한 게 아니라 독을 준 꼴이 됐다.

만약 A씨가 유언장을 남겼더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유언장을 쓰지 않았고, 그런 시도도 하지 않았다. 국회 김상희·인재근·김상훈 의원은 웰다잉문화운동, 유언법제변호사모임, 국회 ‘존엄한 삶을 위한 웰다잉연구회’와 공동으로 9일 국회의원회관에서 ‘현행 유언제도 무엇이 문제인가’ 세미나를 열어 유언장 공적보관제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자필증서 유언장을 작성하고, 법원이나 지자체 같은 공공기관이 보관해주는 서비스가 있다면 골육상쟁을 막을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미국 성인 56% 유언장 작성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집안싸움의 2대 유형은 이혼과 상속 분쟁이다. 13일 대법원의 사법연감에 따르면 이혼소송은 2010년 4만5351건에서 지난해 3만2041건으로 줄어 부부 갈등은 주는 추세다. 반면 같은 기간 상속소송은 3만321건에서 4만6496건으로 53.3% 증가했다. 유언 관련 소송도 조금씩 생겨 2018년 296건에서 지난해 350건으로 늘었다.

이양원 법무법인 부천종합 대표변호사는 이날 세미나에서 상속 분쟁의 원인을 이렇게 분석했다.

“100세 시대 평균수명이 늘면서 노인들이 ‘재산을 물려주는 순간 인생이 끝난다’고 생각해 물려주지 않아요. 가족 유대도 달라져 ‘어머니에게 다 주자’는 시대에서 ‘어머니 포함해서 법대로 나누자’는 의식이 확고해졌습니다. 1인 가구 급증,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아파트 한 채가 의미 있는 자산이 된 점도 상속 분쟁을 야기합니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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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 분쟁이 늘면 가족이 파괴돼 공동체 균열을 초래한다. 삶의 존엄한 마무리에도 큰 흠집을 낸다. 연명의료를 하지 않고 편안하게 임종했지만, 재산 분쟁으로 가족이 원수가 된다면 결코 아름답게 마무리했다고 할 수 없다. 김상희 의원은 “가부장적인 상속 문화의 변화, 부동산 가치 상승, 비혼 등 가족관계 다양화 등으로 인해 상속 분쟁 사건이 증가한다”며 “바람직한 웰다잉 문화를 확산하기 위해 유언장 제도가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갈 길이 너무 멀다. 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공동대표(전 의원)는 “미국 성인의 56%가 유언장을 작성한다. 한국은 통계가 없다. 아무도 유언장을 안 쓴다”고 말한다. 노인실태조사(2020)의 죽음준비 실태 결과에 따르면 노인의 80%가 수의·묘지·상조회가입 등 장례준비에 집중한다. 상속재산처리를 논의한다는 답변은 12.4%에 불과하다.

이양원 변호사는 “유류분을 고려해 비율을 조절해서 유언장에 담으면 된다”며 “몇 가지 형태의 유언장 중 자필증서유언이 가장 작성하기 쉽다”고 말했다. 유산기부 활성화를 위해서도 유언장이 필요하다. 원 대표는 “열심히 일해서 깨끗하게 부를 축적하고, 그게 크든 작든 자기 뜻대로 사회에 환원하는 문화를 확산하려면 유언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독일·일본, 공공기관이 유언장 관리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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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필유언장을 어떻게 어디서 써야 할까. 유언장은 부유한 사람의 일처럼 정말 낯설다. 국회 토론회에서 박인환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독일·일본의 유언서 공적보관제도를 소개했다. 독일은 자필증서유언을 작성해 반드시 구법원(기초자치단체별 법원)에 신청하면 여기서 보관한다. 서면·구두·우편으로도 신청할 수 있다. 구법원은 유언자의 출생지 관할 지자체 공무원에게 유언장 보관 사실을 통보한다. 사망 사실을 통보받으면 유언장을 보내고 이를 받은 법원이 직권으로 개봉한다. 유언장 등록·보관에 90.5유로(12만원) 든다.

고령화 1위국 일본은 ‘재산분쟁 공포’에 대처하기 위해 2020년 7월 유언서보관법을 시행했다. 자필증서유언장에 한해 법무국(지국 도는 출장소)에서 보관한다. 전국에 312곳이 지정돼 있다. 유언서보관관이라는 공무원이 담당한다. 신청자는 언제든지 유언장을 철회할 수 있다. 보관료는 3만7000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