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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세모에 생각하는 ‘기다리는 마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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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1932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장일남은 1950년 전쟁을 피해 연평도로 내려와 1년 정도 머물렀습니다. 이때 제주도에서 전해 내려온 시가(詩歌)를 알게 됩니다. 육지로 떠난 남자는 목포 월출봉에서 두고 온 여자를 그리워하고, 여자는 성산 일출봉에서 남자를 그리워하다 망부석이 되고 만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장일남은 고향을 지척에 두고 가지 못하는 자신의 그리움과 같은 것에 감동하여 제주 방언으로 된 시가에 곡을 붙였으니 1951년이었습니다.

1968년 MBC가 장일남에게 가곡 작곡을 의뢰하자, 방송작가 김민부는 ‘기다리는 마음’의 원전에 표준말로 가사를 붙였습니다.

작가 김민부·판사 황규정의 우정
죽은 친구의 혈육 따듯하게 살펴
부산 유엔군묘지가 남긴 큰 우정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빨래 소리 물레 소리에 눈물 흘렸네// 봉덕사에 종 울리면 날 불러주오/ 저 바다에 바람 불면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파도 소리 물새 소리에 눈물 흘렸네.’

1941년생인 김민부는 초등학교 시절 2년을 월반한 수재였습니다. 부산고 1학년 재학 때인 1956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석류’가 입선하니 열다섯 살이었습니다. 그해 처녀시집 『항아리』를 출간하고, 고3 때인 195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균열’이 당선합니다. 서라벌예술대학 동창인 이근배 시인은 이렇게 회고합니다. “그가 사성(四星)장군이라면 나는 일등병이었다.”

부산문화방송 공채 제1기 PD로 입사해 ‘자갈치 아지매’란 명 프로그램을 만들고 상경한 뒤에는 TBC, DBS 등에서 방송작가로 활동하며 제2 시집 『나부(裸婦)와 새』를 내고, 그가 쓴 오페라 대본 『원효대사』에 장일남이 곡을 붙이고 김자경 오페라단에서 초연해 큰 반향을 일으키던 그는 1972년 10월 27일 불의의 사고를 겪게 됩니다.

김민부에게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황규정이란 친구가 있었습니다. 황규정씨는 서울대 법대를 나오고 사법고시에 합격해 판사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만나기로 약속이 돼 있었는데, 황 판사에게 급한 일이 생겨 약속을 취소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김민부의 갈현동 자택에 불이 나는 사고가 있은 것입니다. 그는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숨지고, 부인은 목숨은 건졌으나 심한 화상을 입었습니다. 황 판사는 “그날 민부를 만났어야 했다”며 평생 자책했다고 합니다.

김민부에게는 사고 당시 네 살짜리 딸이 있었습니다. 황 판사는 친구 딸의 후견인을 자임했습니다. 대학에 진학하자 학비를 대주었고, 학교를 졸업하자 자신이 대표변호사로 있는 법무법인에 취업시켰습니다. 아버지 친구의 도움으로 외동딸은 사회생활을 성공적으로 해나갔고, 그 자녀들도 훌륭하게 장성했습니다. 황 변호사는 2011년 김민부 문학제가 추진될 때 정신적 지주였으며,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친구의 딸은 자신이 설립한 법무법인에서 일하고 있으니 그의 우정은 생사를 넘어 이어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제는 김민부의 부인도 고인이 되었고, 부산 서구 암남동의 시비(詩碑)가 그들의 우정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우리는 부산에서 현대사에 가장 감동적인 우정의 성지(聖地)를 봅니다. 한국전쟁 때, 이름도 모르고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모른 채 오직 조국의 명에 따라 머나먼 곳까지 와서 숨져간 11개국 2300여 명의 유해가 잠들어 있는 재한유엔기념공원입니다. 이곳은 세계에서 유일한 국제연합군의 묘지입니다. 유엔묘지에 안장된 전사자 중 최연소자는 열일곱 살에 숨진 호주 병사 도은트(J P Daunt)입니다. 그를 기리는 도은트 수로(水路)가 있지요.

해마다 11월 11일 오전 11시가 되면 세계 전역에서 부산을 향하는 ‘턴 투 더 부산(Turn to the Busan)’ 행사가 열립니다. 유엔묘지에는 한국전쟁 중 전사한 유엔군 4만896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꺼지지 않는 불꽃이 영원한 세계 평화를 염원하며 전몰장병들의 영혼을 추모하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유언에 따라 전우가 잠든 곳에 함께 안장된 참전 용사, 스무 살 때 헤어진 남편 곁에 안장된 부인의 묘소도 있습니다.

유엔묘지가 한국에 있는 한 한국은 결코 잘못되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전 세계 친구들의 영령이 함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잘못되게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거룩한 희생의 우정을 배신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